[향토문화]항일운동..조천리 조천야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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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항일운동..조천리 조천야학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05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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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양시켰던 역사의 현장

조천리 조천야학터
 

위치 ;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 남쪽
유형 ; 옛 건물
시대 ; 일본강점기


 

 

 

일제강점기의 당시 ‘보통학교’등 제도권 교육은 일본 제국주의에 철저히 동화되도록 강요하는 황민화 교육이자 식민지 교육이었다.

이에 반해 일제시대 크게 성행했던 ‘야학’은 이에 맞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운동’이었고 특히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의 청소년이나 일반 성인들에게 유일한 교육기회였다.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던 도내 대표적인 야학들은 조천야학을 비롯해 하귀야학, 서귀지구야학 등이 있다. 이밖에 도내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야학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시대 도내에서도 많은 야학들이 운영됐었는데 그 중 조천야학의 비밀설립과 일제의 탄압과정은 다음과 같다.


1928년부터 8월부터 조천지역에는 회원 약100명을 규합해 조선청년동맹 제주청맹(靑盟) 조천지부를 조직하고 김순탁을 집행위원장에 선출했다. 1929년 8월13일 지부 청기총회에서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야학을 실시하기로 해 상중동(上中洞)반, 중동(中洞)반, 하동(下洞)반 등 3개반으로 나눠 야학을 운영하면서 마을의 소녀 및 부녀자들을 가르쳤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일제 당국은 1930년 조천리의 신좌문고(新左文庫)에 관계된 인사와 조천 야학활동을 한 항일인사의 가택을 강제 수색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천의 사회주의자이자 항일 인사로 지목받던 김순탁, 김유환, 이재원, 김서호, 김시추, 김중원, 김민화, 윤용석, 김시우 등이 가택을 수색당하고 동시에 많은 서적과 문건을 압수당했다. 이어 소녀야학소의 처녀 수강생인 김복희(16), 박전숙(16), 김시목(17) 등과 유부녀인 부인국(17), 고근협(18) 등 5명이 검거되면서 구속됐다.


이는 첫째,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에서 운영하는 소녀야학소가 인가도 받지않고 개설해 불온한 민중계몽운동을 한다는 이유였다. 둘째, 압수한 문건 가운데 소녀의 노트와 일기장 등에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셋째, 청년동맹조천지부의 반(班) 설치 등은 집회허가도 받지 않고 모여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가지 이유로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위원장 및 동아일보 지국 기자이며 조천소비조합 상무이사인 김순탁(35), 조선일보 지국 기자이며 조천소비조합 이사인 김유환(29),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의원대표 김시추(22), 제주청년동맹원 김시우(24)·윤창석(20)·김지환(17) 등 6명을 각각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하고 미체포된 이재원에게는 구인장을 발부했다.


1930년 4월 9일 법정에서 이의형, 양홍기 등 두 변호사의 무죄변론이 있었다. 재판을 4월 11일로 연기해 증인을 심문한 바, 소녀들은 경찰 조서와는 정반대의 답변을 했다. 소녀들은 경찰관의 고문으로 작성된 허위 조사라고 주장했으나 간교한 일제 당국은 김순탁, 김유환, 김시추 등에게 각기 10개월, 윤창석, 김지환, 김서호에게는 각기 8개월의 징역을 구형했다.


이어 같은해 4월 24일 광주지법 제주지청 단독 공판에 회부됐다. 검거당한 지 70여일 만에 네 차례나 연기를 거듭하더니 4월 23일 제4차 공판을 개정해 일본인 판사 ‘판희’가 1주일 후 선고하겠다고 한 후 폐정해놓고는 바로 다음날 전례없는 속결 처리로 형을 확정선고해 버린 것이다. 일본인 판사에게 기만당한 가족들과 친지들은 재판 당일에야 통지를 받고 급히 조천에서 재판정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재판은 끝나고 수형자들이 유치장으로 끌려가는 모습만 봐야 했다.


이 조천야학사건으로 김순탁, 김시추는 각기 징역 8개월을, 김서호, 김지환, 윤창석은 각기 징역6개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 중에 김순탁, 김시추는 항소해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제주의소리 2007년 3월 1일)


김균숙 할머니(91.조천리)는 1930년 조천야학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현재 조천리에는 ‘1930년 조천야학사건’ 당시 야학에서 공부했던 김균숙(91) 할머니가가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김 할머니는 <제주의 소리>와 인터뷰에서 “당시 난 13살 쯤 이라나서. 낮엔 학교에도 가곡 밤엔 부녀자들만 모앙 허는 비밀 노동야학에도 나갔주. 야학에선 두 권으로 맹근(만든) ‘노동독본’을 배워나신디 나중엔 일본 순사헌티 걸리난 끌려강이네 지금 연북정 자리에 이서난(있었던) 일본순사 주재소에서 매도 하영(많이) 맞았주”라고 회고했다. 조천에서 나고 자란, 평생을 조천에서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당시 자신은 야학 학생 중 제일 어렸고 지역유지였던 집안 어른들 노력으로 다행히 구속되진 않았다고 전했다.


일제 당시 항일운동은 사회주의운동가 중심의 항일운동이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1930~40년대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담당하는데 이들은 야학을 중심으로 기층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지역에서 조천이란 지역은 당시 사회주의운동의 본산과 같은 곳이었다.


지난 2000년 경 북제주군 시절, 제주항일운동 성지인 제주시(당시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의 ‘조천야학’에 대한 복원 사업이 일부 추진되다 중단된 바 있다. 지난 2000년 무렵 故신철주 군수는 지역주민들이 조천항일기념관 일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천 야학터’도 복원해줄 것을 건의하자 이를 추진할 것을 검토하였으나, 당시 야학터의 토지 소유주와 매수협의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아 야학복원 사업은 초기단계에서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중단됐다.


야학 운영 당시인 1930년 경은 초가집이었으나 1970년대 슬레이트 지붕 건물로 개량돼 성당 부속건물로 쓰이다 현재는 조천성당이 이전해 간 이후로 폐가로 방치되다가 2009년 현재의 건물을 만들었다. 일제시대 제주항일운동의 본산과 다름없는, 조천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양시켰던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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