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기원후1~3세기의 유적..우도면 서광리 동굴입구집자리
상태바
[향토문화]기원후1~3세기의 유적..우도면 서광리 동굴입구집자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9.25 0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사인들의 주거지인 동굴입구집자리 및 바위그늘집자리는 제주 특유의 주거유형

우도면 서광리 동굴입구집자리

위치 ; 우도면 연평리 1519번지. 우도우체국에서 남쪽 200여m 길 동쪽 충혼묘지 옆

유형 ; 선사주거유적
시대 ; 탐라시대전기

 


한반도에서는 동굴입구·바위그늘집자리가 구석기시대 보편적인 주거형태이다. 하지만 신석기시대 이후는 아주 드물다.

선사인들은 동굴·바위그늘 대신 야외에 '움집'을 만들고 생활했다. 즉, 신석기시대에는 움집이 대표적인 주거지인 셈이다.


선사인들의 주거지인 동굴입구집자리(Tunnel Dwelling site) 및 바위그늘집자리(Rock Shelter)는 제주 특유의 주거유형이다. 한반도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신석기부터 탐라시대 후기(기원 500∼900년)까지 일시적 주거지로 계속해서 이용됐다.


제주선사문화는 동굴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동굴입구 및 바위그늘집자리는 50여개 알려져 있다. 개발로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이유는 화산섬이라는 지질학적 특성 때문이다.

제주섬은 주로 약 160만년전 이후 신생대 제4기(Pleistocene·갱신세·홍적세) 동안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용암동굴 또는 바위그늘이 만들어졌으며, 선사인들에게는 훌륭한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우도 동굴입구집자리는 일명 '포제동산'으로 불리는 곳에 있다. 용암동굴이 함몰되면서 생긴 입구 주변은 잡목이 무성하다. 동굴내부는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석렬이 이어져 있었다. 석렬 안쪽으로 현무암 자갈로 뒤덮인 둥근 형태의 공간이 형성돼 있다.

동굴내부에서는 탐라초기의 표지적 유물인 곽지리식토기편과 회색도기편, 가로 28㎝ 세로 16㎝ 크기의 대형 갈판도 출토됐다. 출토 유물로 보아 기원 무렵부터 제주 본섬과의 교류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조흔문토기편과 타제석기 등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그것도 가로 세로 50㎝ 크기의 아주 조그만 시험구덩이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서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장의 안내판에는 〈유적은 해발 37m의 속칭 ‘포제동산’이라는 곳에 있다. 규모는 정면 폭 6.5m, 높이 1.4m, 길이 13m 정도이다. 용암동굴이 무너지면서 생긴 입구는 아치형이며 동굴 안쪽에 직경 4.5m 가량 되는 원형의 공간이 있다.

동굴 내부에서 탐라시대전기의 곽지리식토기와 대형 갈판 등이 발견되었다. 이런 유물은 우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제주 본섬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유적은 주변에 분포하는 유물산포지, 고인돌 등을 고려해 볼 때 기원후1~3세기의 유적으로 여겨진다.

우도 동굴유적은 동굴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제주 본섬 이외의 주변 섬에서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중요성을 가진다.〉라는 설명이 있다.

이곳의 선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갈판의 출토는 농경·채집 생활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섬의 여건상 주로 어로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계절 따라 야외 거주지에서의 어로생활과 병행해서 겨울철 등 기후조건이 열악한 시점에서는 동굴을 집자리로 이용했다. 이러한 추측은 오봉리·서광리 일대 유물산포지가 분포하고 이곳에서 탐라초기 유물이 출토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한라일보 2002년 11월 6일, 11월 20일)


또 2008년 10월 9일 한라일보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때 우도는 일본군의 전진거점기지이며 이곳을 탄약고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작성 080505, 보완 12031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