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행2)“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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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2)“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 고현준
  • 승인 2019.10.0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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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흥사단 중국답사2)손권의 오나라 도읍지 소주는 '물의 나라'

 

 

(답사2일차)“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天上天堂 地下蘇杭)”

 

상해에서 소주로 가는 2시간 동안 가는 곳마다 물줄기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물이 많은 고장이라 농업이나 양식업이 많이 발달했을 거라는 짐작이 갈 정도로 수로가 참 많았다.

더욱이 웬만한 수로에는 다양한 선박들이 이 물길을 오가는 모습도 보여 상공업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는 삼국지에 나오는 물의 나라로 알려진 손권의 오나라 도읍지다. 소주라는 이름 때문인지 가는 동안 괜히 마음이 설렜다.


소주를 있게 한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경항대운하는 이를 완성시키는데 800년이나 걸려서 1,700킬로미터를 만들었고 남북을 관통하고 있다고 한다.


이 대운하는 아직도 중국의 각지와 이어져 화물운송의 주요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날 처음 찾은 곳은 중국의 4대 정원의 하나인 유원..
유원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돼 있다고 한다.


중국의 4대 정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원은 화려한 자연석(태호석)이 연못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주었다.

태호석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화산용암인 현무암처럼 이 지역에서만 나는 자연석이라고 한다.
다양한 형태의 큰 태호석이 정원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 좁은 길을 따라 거니는 길이었지만 중국정원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어느 곳을 걸어도 유원은 다양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4대 정원 중 2개는 소주(유원과 절정원)에 있고 북경에도 이화원 등 황제의 정원이 2개가 있다고 한다.
 
강남지역은 따뜻해서 정원을 만든 석상가들이 산과 호수를 만들어놓았다고 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집안에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유원이라는 정원을 만든 유씨는 부모님을 위해 정원을 다양하게 꾸민 것이라고 한다.

 

 

 

 


소주 유원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의 수도였던 소주는 수로와 운하가 발달해 일찍부터 ‘물의 도시’로 번성하였다.

 또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天上天堂 地下蘇杭)”고 했을 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도 유명해 예부터 문물이 번성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 곳곳에 전통 문화유적이 흩어져 있는데, 물의 도시답게 운하와 수로를 따라 크고 작은 원림(園林)이 들어서 있는 것도 소주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소주가 ‘정원의 도시’로 불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원(유위안)은 졸정원(줘정위안, 拙政園)과 함께 소주를 대표하는 정원이다.

둘 다 중국의 4대 정원에 들어가며, 창랑정(滄浪亭)·사자림(獅子林)과 함께 소주의 4대 정원으로 꼽힌다. 줘정위안이 명대(明代)를 대표한다면, 류위안은 청대(淸代)를 대표하는 정원이다.

태복시경(太僕寺卿)을 지낸 서시태(徐時泰)가 1525년에 처음 지었을 당시의 명칭은 동원(東園)이다. 청 건륭제 때인 1794년 유서(劉恕)가 새 주인이 되면서 정원을 확충하고 이름을 한벽산장(寒碧山莊)으로 고쳤는데, 한벽산장보다는 별칭인 ‘유원(劉園: 유씨 정원)’으로 더 잘 통하였다.

광서(光緖) 연간인 19세기 말 마지막으로 정원을 증축하고 보수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류위안으로 바뀌었다.

중부·동부·서부·북부의 4개 경구(景區)로 크게 나뉘며, 각 경구는 700m에 이르는 긴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복도처럼 이어진 회랑 양쪽 벽면에는 중국 역대 명가(名家)의 서법(書法) 300여 편이 새겨져 있다.

 

 

 

 

이를 ‘류위안법첩[留園法帖]’이라고 한다.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벽면마다 서로 다른 모양의 화창(花窓)이 나 있고, 이 화창을 통해 밖의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각 경구의 담과 석물(石物)·축산(築山) 등도 저마다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드넓은 시선을 제한하면서 갖가지 기하학적 조경수법을 통해 감상의 맛을 극대화하는 중국의 전형적인 정원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류위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로는 단연 관운봉(冠雲峰)·좌병(座屛)·어화석(魚化石)을 꼽는다. 이 셋을 류위안삼보[留園三寶]로 부른다. 6.5m 높이의 관운봉은 구멍이 뚫린 태호석(太湖石)으로, 태호석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태호석으로 꼽힌다.


대리석 좌병은 강남제일청당(廳堂)으로 불리는 오봉선관(五峰仙館) 안에 있고, 대형 어화석은 북쪽 담장 중앙부에 있다. 그 밖에 중국 역대 문인들의 글을 빌려 이름 붙인 수많은 누각과 정자, 연못 등도 저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두산백과)

 

 

소주가 만들어진 아름다운 왕 이야기

 

상해에서 소주로 가는 동안 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는 내내 평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소주에는 그나마 2개의 산이 있다고 한다.


호소산과 호구산이다.우리는 호구산을 올랐지만  호소산에는 소주 2500년의  역사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를 안내했던 이순화 가이드는 “소주는 산이 많지 않은 곳”이라며 “산은 2개밖에 없고 그나마 높지도 않아  산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소주가 만들어진 역사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상조말기에 태백이라는 사람이 당시 왕의 큰 아들로 왕위에 오를 위치였지만 당시 왕이 막내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왕의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둘째 동생을 데리고 이곳에 와 주민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고구라는 나라를 만들었는데 이 나라가 후에는 주나라로 커진 것이라는 얘기다.


당시 소주라는 곳은 부락 정도의 지역이었지만 태백의 이같은 정신을 높이 사 나라로 인정해준 것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양자강 유역의 문명이 황하의 문명보다 훨씬 앞섰다"고 하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한산사의 풍요야박(楓橋夜泊)

 

 楓橋夜泊(풍교에서 묵는 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 지고 까마귀 울자 서리 하늘에 가득하고)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강가 단풍 고깃배 등불에 시름겨운 잠자리)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 밤중의 종소리 나그네 배에 들려오네.)

 [출처]동양시한시(東洋詩漢詩 poem poetry) 楓橋夜泊_張繼(풍교야박_장계) 풍교에서 묵는 밤[작성자 영원속으로]

 


당(唐)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한산사의 종소리에 나그네의 시름을 담아 묘사한 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은 고금(古今)의 명시(名詩)로서 민간에도 널리 전해지면서, 이 시 하나로 인해 한산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산사에는 각가지의 풍요야박이라는 글과 시가 많은 사람들로 인해 다양하게 쓰여져 전시돼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한산사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때 창건되었다. 원래 명칭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名塔院)이었으나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선승(禪僧)이자 시명(詩名)이 높았던 한산(寒山)이 주지를 맡았다고 하여 한산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청(淸)나라 광서제(光緖帝)와 선통제(宣統帝)에 걸쳐 대규모 개수사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존하는 건축물들은 모두 이때 보수 및 재건된 것이다. 1949년에도 대대적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중요한 사찰이자 명승지로 발전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산문(山門)·대웅보전(大雄寶殿)·장경루(藏經樓)·종루(鐘樓)·비랑(碑廊) 등이 있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있는 나한당(羅漢堂)에는 녹나무로 만들어 도금한 500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한산사에서 가장 진귀한 유물로 꼽힌다.

두 번째로 진귀한 유물은 장경루에 보존된 송(宋)나라 때 제작된 《금강경(金剛經)》 석각이다.

비랑에는 당(唐)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 시비(詩碑)를 비롯하여 악비(岳飛)·당인(唐寅)·문징명(文徽明)·캉유웨이[康有爲] 등의 시문이 새겨진 비석, 양저우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나빙(羅聘)이 그린 습득(拾得)의 화상(畵像)을 새긴 비석 등 진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장계(張繼)가 한산사의 종소리에 나그네의 시름을 담아 묘사한 〈풍교야박(楓橋夜泊)〉은 정경(情景)이 어울리는 고금(古今)의 명시(名詩)로서 민간에도 널리 전하여졌으며, 이로부터 한산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종소리와 고찰(古刹), 객선(客船), 고기잡이배의 등불 등은 관광객이 다투어 감상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때 주조된 거대한 종이 보존되어 있는데, 1979년부터 제야(除夜)에 타종(打鐘)하는 민속행사가 재개되어 고찰의 정취가 더욱 짙어졌다.(두산백과)

 

 

소주의 호구산

 

소주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호구산에는 호구탑이라는 피사의 사탑과 닮아 옆으로 기울어진 탑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무너질 듯 서 있었지만 지금은 기울기를 줄여주는 조치를 해서 앞으로도 수백년간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소주사람들은 "아마 이 탑이 만약 무너진다면 이 나라에 큰 궤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호구산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은 작은 수로 하나가 흐드러진 버드나무와 어우러져 예쁜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전설같은 얘기들이 이어졌다.

춘추전국시대에(기원전770~476) 오나라 합려가 죽은후 하얀호랑이가 와서 무덤을 지켰다고 해서 호랑이 호자에 언덕 구자를 부쳐서 지은 호구산으로 불린다는 조그마한 산.

호구산 관광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 호랑이 등을 타고 올라 호랑이 꼬리로 나오는 코스라고 한다.

이곳에는 당시 오나라  합려왕이 보검을 좋아해서 무덤에 3천개의 보검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지난 60년대에 이 묘비를 파보려고 했는데 당시 주은래가 "지금 우리의 기술로는 발굴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중단시켰고 지금도 발굴기술이 없어 발굴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소주 호구탑(虎丘塔)

959년 오대(五代)의 후주(後周) 때 착공하여 961년 북송(北宋) 태조(太祖) 때 완공된 누각식(樓閣式) 탑이다.

송나라 때 건립된 탑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구조도 정교하다. 벽돌로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쌓아올린 8각형 전탑으로, 모두 7층이며 전체 높이는 47.5m이다.

각 층마다 탑신(塔身)의 허리 부위에 처마 (平座)가 있고, 내부는 망원경식의 회랑 구조에 나무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었다. 각 층은 외벽으로만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건축기법은 탑 안에 계단을 설치하는 건축기법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것이다.

이 탑은 당(唐)나라 이전의 속이 비어 있는 공통식(空筒式) 구조의 일부 특성을 보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부위의 표현기법에서 당나라와 송나라의 과도기적 풍격이 엿보인다.

탑신의 내부와 외부에 많은 조소(彫塑) 장식을 한 것도 특별히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탑신의 내벽 각기둥의 중간쯤에 꽃다발을 새겨 장식하였는데 외래의 장식 수법을 모방한 흔적이 뚜렷하다.

이처럼 탑의 기둥에 장식한 표현 수법은 당나라 이전의 석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랑 안쪽 탑 기둥의 외벽에 작약꽃(芍藥華) 등 여러 가지 꽃무늬와 호수와 돌 등을 새겨서 장식하였는데, 이와 같이 가짜 산과 호수, 돌을 따로 진열해 놓은 고탑(古塔)은 오늘날에는 보기 드물다.

 1957년 기울어진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 석함을 통하여 창건연대가 밝혀졌고, 탑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여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윈옌사탑은 '피사의 사탑'보다 창건 연대가 100여 년 앞선다.(두산백과)


호구산에는 많은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고 이를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우리는 역사적 의미가 더 많이 담겨있는 다음 코스를 따라 남경으로 향했다.

 

 

 

 

 

 

 

 

 

 

 

 

(이 기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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