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선조 때 헌마공신 된..의귀리 김만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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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선조 때 헌마공신 된..의귀리 김만일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1.0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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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천변 ‘반기밭’ 일대는 김만일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텃밭이다.

의귀리 김만일묘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2009年 7月 29日 지정)
위치 ; 의귀리 푸른농원 입구에서 들어가서 제6의귀교(다리)를 지나 푸른농원 표지가 보일 때 왼쪽 소로로 들어가서 창고 옆 길로 올라간 곳
시대 ; 조선
유형 ; 무덤

 

 

제주는 역사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말의 고장’이다. 제주목장은 조선시대는 물론 元·明시대에도 군마공급지로서 명성을 떨쳐왔다.

제주가 말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데는 천혜의 목양지라는 지리적 여건과 “마정은 군국의 중대한 일”로 인식했던 조정의 강력한 목마정책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 몇 차례에 걸쳐 정비되었던 마정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장 관리에 어느 정도 경험을 가진 지방 토착인들을 기용할 것인가, 아니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에게 그 책임을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제주비장의 토착인들을 감고(監考) 등에 임명하여 목장 관리의 책임을 맡도록 하였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 관리들과 유기적인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에 고려 시대의 제도를 일정 기간 유지시키다가 1408년(태종 8)에 애마자장관제령(愛馬孶長官提領)을 고쳐 감목관(종6품의 외관직)을 설치하였다. 감목관을 설치한 후 목장 관리를 모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일임해 나갔으며, 목마업에 직접 관여하는 직책만 지방 토착인들을 기용하였다.


1425년(세종 7)에 병조에서는 목장의 암말 100필을 단위로 하여 군(群)을 편성하여, 암말 100필을 책임지는 군두(群頭), 50필을 책임지는 군부(群副), 25필을 관리하는 목자(牧子)를 두었다.

이로써 제주목사-감목관-마감-군두-군부-목자로 이어지는 획일적인 마정 조직이 마련되었다. 3읍의 감목관(제주판관·정의현감·대정현감이 겸임)은 소관 지역의 목장을 각각 관리하면서 제주목사의 감독을 받았다. 따라서 감목관은 소속 목장의 마감, 군두, 군부, 목자들의 근무를 고찰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동전)


그 중에서도 제주목장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김만일과 그의 아들이며 산마장 세습감목관의 기초를 놓았던 김대길,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은 제주의 말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김만일은 명종5년(1550) 정의현 의귀리 출신으로 개인의 목장인 사둔장·사목장을 운영했던 사람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중임(重臨)으로 선조 때 헌마공신이 되었다.


김만일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15년(1582) 순천부에 있는 방답진 첨절제사(防踏鎭僉節制使)가 되었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목축사업에 뜻을 두어 선대로부터 내려온 마축개량번식에 전념하였다.

당시 말은 전마(戰馬), 승마(乘馬), 역마(驛馬) 등으로 국가적인 비중이 컸었다.(남제주 문화유적 74쪽) 그가 경영했던 사목장은 양마를 많이 산출하여 유명했는데, 말은 만필에 이르고 그 면적은 한라산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조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말은 모두 그가 기른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김만일목장에 대한 몇 가지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다음의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김만일의 처는 강씨인데 강씨 집안은 상당히 재력이 있었지만 양반들로부터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만일은 양반집안 출신이기는 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아무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강씨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수말(種馬) 한 마리를 목장에 놓아기르는데 하루는 이 말이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은 말을 찾기 위해 동고량(차롱)에 점심을 싸들고 목장에가 보았더니 의외에도 이 수말이 일백여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살펴보니 그 말들은 전부 처가의 것이었다. 사위는 곧 처가에 연락하여 이 말떼를 다 몰아가게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이 수말이 또 다시 그 말떼를 전부 거느리고 돌아왔다. 몰아 가면 말떼를 이끌어 가고 오고를 수십 번 하다보니 처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 말떼들을 전부 가져 버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김씨댁은 일약 부자가 되었다.

이 말이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수년 내에 말은 수백 필이 되었다. 말이 크게 불어나자 김씨는 말 5백 필을 나라에 바쳤다. 또는 그는 젊었을 때 암말 2필을 얻어 산야에 방목하여 수십년만에 수천필을 번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도 한다.


김만일의 말이 많다고 하더라도 혹 진상에 합당한 것이 없을 때에는 관가에서 말이 있는 집의 가동을 가두어 징삭(徵索) 하였고 이렇게 해서도 얻지 못하면 편복에 따라 그 처(妻)를 가두고 그 자식을 장(杖)하는 등 無所不至의 방법으로 하였다.

더구나 탐관오리는 진상을 빙자하여 많은 말을 징(徵)하여 사용(私用)으로 삼아버리며 또한 馬屯(말 무리)에 다소 좋은 말이 있으면 삼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탈취하므로 준(駿)한 말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김만일은 말의 절종(絶種)을 걱정하여 성장하여 준마가 될 말에 일부러 눈에 상처를 내어 맹목(盲目)이 되게 하거나 피부와 귀를 째어서 흠이 있는 말로 만들어 잘 보존하였다가 종마로 사용하였다.

김만일은 본도의 정병(本島正兵也)이였는데 그는 젊었을 때 자마(雌馬=암말) 2필을 얻어서 旌義境(정의현지경)에 방목하여 그 말들이 새끼를 많이 낳고 암말들은 모두 2세(二禾)에 임신하면 모두 보통 말(駿異)을 낳으므로 수년 내에 많이 번식하여 수백 필에 이르렀고 점차 지금 상태로 이른 것이다.(http://cafe349.daum.net/)


그 뒤 목장은 날로 번창하여 광해군4년에는 마필 수가 국영목장인 국둔마의 3∼4배 이상이 되었다. 그는 선조33년과 광해군12년 전투마 5백필과 3백필을 각각 바침으로써 헌마공신의 호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직(종2품)을 제수받았다.

효종9년(1658)에 김만일의 아들 대길과 손자 여(礪)가 전마 2백80필을 국가에 헌납했는데 목사 이증(李增)이 그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종문세습직으로 감목관직을 특설하도록 조정에 품신하였다.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 동서에 산마장을 만들고, 마필을 바친 공로로 산장감목관(종6품)에 임명하고 후손들이 이를 세습토록 했다.(이 제도는 83대 감목관인 김경흡을 끝으로 종문의 청원에 의하여 1895년 직제가 폐지될 때까지 237년간 지속되었다.)

그 후 산마장은 남원읍(9소장), 표선면(10소장), 조천읍(2소장) 등 한라산 중턱에 주위 200여리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다.(한라일보 2002년 7월 10일, 남제주 문화유적 75쪽)


한편, 산마장은 10소장(전체의 소장)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점이 있었다. 즉, 감목관을 수령(현감)이 겸한 데 비해, 산마장은 토착인으로 조직되었고 감목과 또한 목마를 전통적으로 해 온 김만일 일가가 관장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인데, 이로써 말 사육기술의 전수가 용이하였고 산지에 능률적으로 적응할 수 있어서 국내외에 유명한 양질의 산마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산마장의 마필수는 설치된 지 10년 만에 1000여 필에 달하였는데, 정조 16년에 1572필, 철종 11년에 1037필에 이르렀다. 산마(山馬)는 품질이 우수하여 초기부터 높이 평가되어 왔는데, 이 山馬들은 御乘馬로는 물론 신하들에게도 분배되었고, 명나라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제민일보 2005년 11월 2일)


조선시대 태종 15년(1415)에 사목장(私牧場)에서 사육하는 말에 낙인(烙印)을 찍고 매매한 것으로 보아 과거 제주도에는 사둔장(私屯場: 字牧場)이라 불리던 사목장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둔장은 개인이 목장을 설치하여 경영한 것으로 생산된 말은 국가에 등록하고 매매처분 등에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 장덕지 교수(제주마문화연구소장,제주도문화재위원)의 글. http://cafe349.daum.net/)


그는 말을 헌납한 공으로 관이 부총관에 이르고 나이는 80에 죽었다고 한다.(納馬有功 官至副摠管 年至八十而死云)


남원읍 의귀리를 관통하는 서중천변에 위치한 ‘반기밭’ 일대는 이들 김만일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텃밭이다. 이곳에는 세습감목관을 지내며 제주목장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던 김만일 후손들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김만일 분묘는 원형의 대형봉분으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민묘와는 형태와 규모면에서 크게 달라 유적으로서도 가치가 크며 분묘 문인석의 경우도 17세기 전반에 조성됐기 때문에, 조선중기의 표식유물로 삼을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김만일 묘의 동자석 4기가 경기도로 반출된 것을 찾아 왔으나(http://cafe351.daum.net/) 다시 도둑맞아 현재 동자석이 있었던 자리는 움푹 패인 채 남아 있다.


한편, 김만일 가계의 소장 고문서들은 1994년 후손들에 의해 제주교육박물관에 기탁됐다. 김만일의 아들인 김대길의 초대 산마감목관 임명 교지를 포함해 국가가 김만일 가계의 구성원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발급했던 교지와 교첩, 과거급제 합격증서 등 모두 51점에 달한다.(제주일보 2007년 10월 5일)
김만일 묘의 오른쪽에는 부모의 묘가 있고 100m쯤 앞에는 역대 감목관 묘역이 있다.
《작성 080601, 수정보완 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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