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기자치성의 명소..삼양1동 원당봉제사터(산신단,기우제,기자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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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기자치성의 명소..삼양1동 원당봉제사터(산신단,기우제,기자치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3.20 0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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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삼첩칠봉인 원당봉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진 장소이다

삼양1동 원당봉제사터(산신단,기우제,기자치성)
 

위치 ; 제주시 삼양1동 원당봉 문강사 연못 북쪽
유형 ; 민속신앙
시대 ; 미상(고려시대 추정)

 

 


원당봉은 원나라 때 이 오름 중턱에 원나라의 당인 원당(元堂)이 있어서 원당봉(오름), 조선시대 때 원당봉수가 세워진 데서 망오름, 삼양동에 있어서 삼양봉,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어 원당칠봉(일명 삼첩칠봉)이라고도 한다.

원당봉은 주봉(큰원당오름)을 중심으로 북쪽에 망오름, 망오름 동쪽에 도산오름, 서쪽에 앞오름, 앞오름 남서쪽에 펜안오름 그리고 주봉과 망오름 사이에 나부기(동서로 나누어져 있어 동나부기, 서나부기라 함)로 구성되어 있다.

주봉의 원형굼부리는 말굽형으로 북쪽이 트였다. 문강사가 세워진 분화구는 예전에는 논밭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이 오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등에 '원당악', [탐라지도],[제주삼읍도총지도],[해동지도]등에 '대원당', [제주군읍지]에 '원당봉', [증보 탐라지]에 '원당봉', 삼양봉, 주변의 묘비석에 '원당, 원당산, 원당봉, 원당'등으로 표기하였다.

주민들은 보통 '원당오름, 원당봉'이라 부른다.


"元堂峰 : 一名은 三陽峰이라. 濟州邑 三陽里 境界線上 海岸一周도로 北側에 在하니, 高가 170.7米오, 小三角點이 有하고 頂上에 池가 有하야 大旱에 不渴한다."(증보 탐라지 산천)


'웬당오롬'은 제주 동쪽 17리에 있다. 산봉우리에는 못이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못에는 마름, 거북, 자라가 있다.(元堂岳, 在州東十七里,峯頭有池 大旱不渴, 池有빈藻龜-)(新增東國與地勝覽 권38, 제주목, 산천)


'웬당오롬'은 제주 동쪽 20리에 있다. 산봉우리에는 못이 있는데 '거북못'이라고 한다. 못에는 마름, 거북, 자라가 있고,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元堂岳, 在州東二十里, 峯頭有池 名龜池,有빈藻龜_, 大旱不渴)(李元鎭의 耽羅誌 제주목, 산천)


원당봉 굼부리 입구에 사각형으로 돌담을 두르고 시멘트로 마감한 제사터가 있다. 북쪽으로 입구가 나 있다. 이곳은 삼첩칠봉인 원당봉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진 장소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문강사 앞의 연못은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예부터 이곳이 기우제 장소이며 산신기도처로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아들을 바라는 여인들이 새벽에 찾아와 기도를 올리는 기자치성(祈子致誠)의 명소이다. 원당봉의 굼부리가 여성의 성기와 흡사하며 이 기도처는 자궁의 입구에 해당한다고 한다.

돌담으로 둘러진 내부는 10평 정도이며 남쪽에 시멘트로 만든 제단이 있다. 내부의 서쪽 구석에는 비석이 하나 있다. 비석에는 '元堂峰祭壇修理築塔施主芳名紀念碑' '大化主 金順化 高龍準 金瑛斗' 그리고 시주한 여러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제주여성문화유적 66쪽)


과거 삼양동 사람들은 원당봉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산신기도를 이곳에서 올렸다.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두고 흔히 산신불공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모시는 신은 산신이지만 무속적인 산신이 아니라 도교의 산신인 듯하다.

또한 불공을 드린다고 하였으니 불교적인 신앙도 습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은 무당들이 넋들임 장소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마을어른들 중에는 어릴 때(1940년대) 기우제 지내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내게 되면 주민들 중에서 제관으로 뽑힌 남자들이 장막을 치고 머물면서 치성을 하는데 희생으로는 주로 돼지를 통째로 사용한다.

그런 뒤 제관들은 이 오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데, 여자들이 바닷가에서부터 허벅으로 오름의 중턱까지 물을 길어 올리면, 남자들은 이 허벅물을 받아 제관이 위치한 곳까지 위로 계속 전달한다. 최종적으로 전달받은 제관들은 물을 꼭대기 부분에 펑펑 쏟아 붓는데, 이때 여자들은 오름 꼭대기에는 오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오름나그네)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2014년) 삼양초등학교 편에 의하면 1964년 8월에 가뭄이 들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방법은 희생을 올리고, 축문을 지어 읽는 유교식이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들과 협의하여 합동회의를 열고 거기에서 제관을 선출하는데 초헌관은 먼저 발의한 마을에서 맡았으며 겅비는 참여하는 마을마다 균일하게 부담했다고 한다.


이곳은 금장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 금장지로 정해져 있어서 무덤을 만들지 않는데, 어느 해에는 삼양, 화북, 도련, 신촌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금장지에 무덤이 있는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몰래 봉분을 만들지 않고 깊이 묻은 무덤이 발견되어 이를 이장하도록 하니 금새 비가 내려 해갈되었다고 한다.
《작성 081229, 보완 120625, 1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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