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려 개국공신 趙孟의 12세손..상효동(영천동) 풍양조씨입도조(조세진)묘(이장)
상태바
[향토문화]고려 개국공신 趙孟의 12세손..상효동(영천동) 풍양조씨입도조(조세진)묘(이장)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6.24 15: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석을 세운 연도가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1900년 전후라고 추정된다.

상효동(영천동) 풍양조씨입도조(조세진)묘(이장)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1235번지.
유형 ; 묘
시대 ; 조선

 

 


조세진의 묘는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북쪽 첫 골목으로 들어가 처음 돌담이 트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길은 없고 20m 지점에서 수풀 사이로 난 소로로 들어가면 있다. 지도에서 보면 서귀산과고 북동쪽에 붙은 밭이다.


조선 성종 때로 추정되는 시대에 고려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인 趙孟의 12세손인 趙世珍이라는 사람이 육지에서 단신으로 들어와서 지금의 하례2리 샘밑도 북쪽에 살기 시작하였다.

조세진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영특하여 모든 생활을 지혜롭게 해 나갔다고 한다. 하례2리는 땅이 비옥하기도 하지만 정의·대정을 왕래하는 중간에 위치하여 관헌이나 일반인들이 다니다가 숙박하는 길목이었다.

조세진은 탐라고씨와 혼인을 하고 농사도 짓고 주막을 운영하며 재산을 많이 모았다. 조세진의 부는 이웃 고장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는데 신례리 양수진(梁壽津)이라는 부자와 경쟁하기도 했지만 친하게 지냈다.

양수진은 봄철에 호박이나 오이 묘종을 키울 때 벌레가 갉아 먹지 못하게 놋그릇 뚜껑을 덮어서 키웠다고 하니 얼마나 부자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 두 사람이 워낙 부를 누린다는 소문이 있어서 관가에서 주민들을 착취한 것은 아닌가 하고 감사를 하기로 했다. 조세진과 양수진은 감사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위미리 망오름까지 천을 깔아서 관헌을 맞이하였다.

신례리에 들른 관헌은 양수진에게 '소문난 부자라면 총과 화약도 가진 게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양수진은 '다른 것은 다 있어도 그것만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엔 조세진의 집에 도착하여 '신례리 양수진은 부자라고 해도 별로 가진 것이 없어 보이던데…. 그래도 총과 화약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부자라고 하지 않겠는가?' 했더니 조세진은 '예, 있습니다요. 나는 양수진보다는 부자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관헌은 갑자기 포졸을 불러 '이놈을 당장 결박하여라.' 하고 체포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발전된 화약 제조법이 조선시대에 들어 일부 부자들은 화약을 소장하게 되어 이들을 색출하려고 하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조세진은 공연한 자랑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때가 중종21년(1526) 경이라고 한다.


이 일이 있고나서 목사 이수동은 조정 진상을 위하여 과원을 만들 장소를 물색하다가 마침 이곳이 최적지라 여기고 귤, 뽕나무, 닥나무, 치자, 칠나무, 동백 등을 재배하고 방호소 병졸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 때 만든 과원이 亭子, 별과원, 牛田, 禁物, 향목, 원통, 성산 등이다. 금물과원 터는 하례2리 1570번지이며 지금도 이곳을 금물과원이라 부른다.

제주에서 본격적인 과원 조성은 중종21년(1526) 이수동 목사 때부터라고 하니 전해오는 이야기와 일치한다.


아곳에서 쫓겨난 조세진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서상효로 피신하여 살았다. 서상효로 간 후에 친구인 양수진과 사돈을 맺었다.

조세진의 딸이 양수진의 아들 梁潭과 혼인을 한 것이다. 그리고 서상효는 본래 물이 귀한 곳이라 손수 샘줄기를 발견하여 우물을 파서 물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 조개물이다.


조세진은 아들 德瑾을 두었으며 하례2리와 서상효에서 2대를 살았다. 조덕근의 묘는 신례리 동쪽 안밭골에 쌍묘로 있다. 사위 양담 부부의 묘는 신례리 동쪽 고장남동산에 쌍묘로 있다.

조세진의 딸은 현재 신례리에 생존해 있는 양병선씨의 14대 할머니이다. 이후 후손들은 성읍, 수산, 표선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수산리 579번지 조원봉씨는 조세진의 17세손이다.

묘는 그리 크지 않지만 부부합장묘이다. 비석은 높이 51cm이고 너비는 아래 26cm, 위 24cm이다.

매우 작은 편인데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원칙에 따라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전형적인 갈(碣)의 양식이며 받침돌도 무늬를 넣지 않은 방부이다.


비갈 앞면에는 始祖孟趙世珍淑夫人高氏墓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시조의 성함이 孟인 조세진과 숙부인고씨의묘’라는 뜻이니 본관을 쓰지 않고 시조만 쓴 것이 특이하다. 趙孟은 풍양조씨의 시조이다.


뒷면에는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世珍子德瑾失子良’이라고 되어 있으며, 좌측면에는 글씨가 없고 우측면에는 ‘十一代 東權’이라고만 새겨져 있다.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는 벼슬 이름이다. ‘子德瑾失子良’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풍양趙氏 족보에는 濟州入島 1세 世珍, 2세 德瑾, 3세 良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세진의) 아들은 德瑾이며 (덕근은) 그 아들 良을 잃었다.’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비석을 세운 사람은 11代인 東權인데 이분은 해방후 초대 표선면장을 지낸 '範九'의 부친이다. 따라서 비석을 세운 연도가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1900년 전후라고 추정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