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오름 능선에서도 갱도진지 확인..선흘2리 거문오름갱도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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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오름 능선에서도 갱도진지 확인..선흘2리 거문오름갱도진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7.15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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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7일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한 거문오름용암동굴계 형성한 모체

선흘2리 거문오름갱도진지

 

위치 ; 조천읍 선흘2리 470-9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방어유적(갱도진지)

 

선흘2리_거문오름갱도진지(한라일보).

 

선흘2리_거문이오름갱도진지1(0807)내부.


거문오름(거문이오름)은 함덕초등학교 선인분교장 동쪽, 번영로 북쪽에 붙어 있는 오름이다.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에 걸쳐 한라산 기슭에 분출 생성된(http://media.daum.net/society/) 거문오름의 가운데 분화구는 깔대기처럼 움푹 들어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조천읍 선흘리와 구좌읍 덕천리에 걸쳐 있으며, 거문오름용암동굴계를 형성한 모체로 알려져 있다.

거문오름은 정상부의 해발고도가 456m, 둘레 직경은 4,551m이며 정상에는 깊게 패인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작은 봉우리가 솟아올라 있으면서 북동쪽 산사면이 크게 터진 말굽형 분석구(cinder cone or scoria cone)의 형태를 보인다.

거문오름의 화구는 처음 형성되었을 때에는 원형이었으나 이후 여러차례 용암이 분출하면서 북동쪽 산사면이 무너지면서 말발굽 모양의 오름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문오름은 2007년 6월 27일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한 곳이다.


선흘2리 거문이오름 분화구에는 10여 개의 갱도진지가 있다. 이곳에는 일본군 108여단이 주둔했었다고 한다.

일제가 거문오름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1945년 4월. 패전을 코앞에 둔 전쟁 막바지로 일제는 제주도를 최후 방어선으로 삼고 만주 관동군까지 7만5000여 병력을 집결시켰다.

연합군의 제주 상륙작전에 대비한 것이었는데 거문오름은 당시 섬 동부를 담당한 108여단 사령부(주둔 병력 6000명) 주둔지였다. 분화구 안은 물론 밖에도 당시 판 갱도와 진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분화구 내부에서 확인되는 갱도진지는 모두 6곳으로 알오름 사면을 뚫고 만들어져 있다. 길이는 각각 15m 내외의 직선형 구조를 보여준다. 갱도진지 폭은 140cm, 높이는 200cm 내외로, 10여m 안팎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뚫려 있다.


갱도 바닥의 떨어진 돌 틈에서는 철제 꺾쇠 10여개가 확인됐다. 꺾쇠는 당시 갱도내부에서 갱목들을 고정시키거나 연결시키는 데 사용됐던 것들이다.

나무에 그대로 박혀있는 모습도 볼 수 있어 60여년 전 갱도진지 구축상황을 엿볼 수 있다. 갱도진지 앞에는 많은 석축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분화구내 갱도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등을 저장하기 위한 용도 등으로 추정된다. 오름 분화구에는 병참도로 흔적도 볼 수 있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일본군 대부분 병력의 주둔지는 오름 외부의 널따른 개활지다.


거문오름에서는 분화구 내부뿐 아니라 오름 능선에서도 갱도진지가 확인된다. 분화구 안쪽 사면 8부 능선지점에 있다. 길이가 각각 60여m에 이르는 갱도 2곳이 있다. 거문오름 갱도진지 가운데는 가장 긴 것이다.

폭과 높이는 각각 80cm, 1백70cm 정도 된다. 한 사람이 걸어다니기에도 공간이 좁다. 이곳의 갱도는 분화구 내부의 것과는 달리 스코리아(scoria)층을 뚫은 형태다.

갱도진지 2곳은 내부에 별다른 공간을 만들어놓지 않았다. 이는 상시 병력주둔용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정상부를 향해 뚫려 있으나 관통된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갱도 내부에는 정상부와 관통하려고 시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정상부에는 수직굴 흔적이 남아있다. 이로 미뤄보면 정상부와 연계한 통로로 생각할 수 있다.


갱도진지 입구에서는 구좌지역 오름군이 한눈에 보이고, 멀리 성산일출봉과 서우봉까지 조망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지닌 곳이다. 성산일출봉과 서우봉에도 일본 해군의 자살특공정진지가 만들어져 있다.


1945년 '결7호작전' 당시를 보여주는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에는 거문오름 일대가 108여단 사령부로 표시돼 있다. 108여단은 유격전에 대비한 부대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군의 또다른 군사지도인 '제주도병력기초배비요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제주 동부지역의 유격진지대로 표시돼 있다.

그 가운데서도 거문오름 일대와 분화구 내부는 외부의 관측이나 직사화기, 또는 공중폭격으로부터도 완벽히 엄폐, 은폐되는 천혜의 주변여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여건이 결국은 일본군이 거문오름 일대를 주목하게 한 요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주둔 일본군 최고지휘부는 제58군이다. 58군은 그 예하에 96사단, 111사단, 121사단과 108여단 등 3개 사단 1개 여단으로 편성됐다. 108여단은 주로 제주 동부지역에 집중 배치됐다.


스이(翠)부대라 불린 108여단은 총 병력이 6천여 명에 이른다. 여단장은 히라오카 츠토무(平岡 力) 소장으로 1945년 4월 16~17일 사이 제주에 진출했다. 108여단은 유격전을 주요임무로 했다. 제주 동부지역은 오름군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또한 연합군의 유력한 상륙예상지점인 제주서남부와 대칭되는 지점이다.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08여단이 제주 도착부터 동부지역에 배치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도착 즉시 서귀포 남원 표선 성산 일대에 배치된다. 이어 1945년 6월 중순이 되면 제주 동부지역으로 이동 배치된다. 조천읍 함덕을 경계로 구좌 성산 표선 남원일대가 해당된다.

108여단 일부 병력은 태평양전쟁이 일본군의 패전으로 치달을 무렵인 1045년 7월 말쯤에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 부근으로 이동, 서부지역에서의 결전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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