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남원 일대 중산간 토벌..의귀리 토벌대주둔지(의귀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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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남원 일대 중산간 토벌..의귀리 토벌대주둔지(의귀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9.16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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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홈페이지(의귀리)를 보면 토벌대가 거짓정보를 흘려 유격대를 유인했다고 한다.

의귀리 토벌대주둔지(의귀초등학교)

 

위치 ;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483-3번지 의귀초등학교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토벌대주둔지

 

토벌대주둔터

 


현재의 의귀초등학교는 1948년 12월 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약 한 달 동안 학살이 심했던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당시 2연대 연대장은 함병선, 1대대 대대장은 전부일, 2중대 중대장은 설재련이었다.

학살의 직접적 책임자인 중대장 설재련은 나중에 육군 제1훈련소 후생감찰로 발령 받아 소령으로 진급했고, 또 제주도 위수지구 사령부 고등군법회의 심판관으로 있다가, 후일 준장으로 예편하곤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경비사관학교 4기생 가운데 장군 진급자가 10명인데 유독 설재련만 이민을 갔다.


이들은 남원 일대의 중산간 토벌을 맡았었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곳에 근무했던 이윤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2중대는 1948년 12월 16일 제주에 들어와 12월 26일 의귀리에 주둔을 시작했으며, 학교 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 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사로잡힌 주민들은 학교 건물에 수용했다. 또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들은 이 일대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2중대에 귀순하자 같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주민들에 대한 첫 학살은 1949년 1월 11일에 있었다. 1949년 1월 10일 산사람(빨치산)들이 5시경에 주민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정보가 그 두 시간 전인 3시경에 2연대에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습격한 15명의 무장대는 학교 지붕 위에 기관총을 장착하고서 기다리던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날인 1월 11일 11명의 수감자가 군인들에게 학살되었다.(제주의 소리 2004년 5월 8일)


그러자 이틀 뒤인 1월 12일에는 무장대가 이 학교의 토벌대를 기습했다. 이틀 전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아니면 수용되어 있는 주민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제주도청 마을 홈페이지(의귀리)를 보면 토벌대가 거짓정보를 흘려 유격대를 유인했다고 한다.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학교를 나간다고 거짓정보를 흘리자, 그 정보를 접한 유격대들은 학교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이 날의 상황을 현길언은 소설(깊은적막의끝)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제 그들은 비인도적인 술책을 도모하여 현대화된 병기로 우리 인민을 개․돼지처럼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우리들의 전략거점인 중산간마을을 초토화하고 인민유격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온갖 감언이설을 유포함으로써 혁명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간악한 전술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그들의 꾐에 빠진 동지들과 인민들이 많이 하산하였습니다만 결국은 그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 그들은 이 전략의 성패를 남원 지역에서 판가름하기 위해 의귀국민학교에 1개 중대의 군병력을 주둔시키고 본격적인 인민초토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작전으로 이틀 전에 중산간 부락 인민들이 그들에게 체포되어 지금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번 작전을 통해서 그들을 구출하고 토벌대를 섬멸함으로써 미제국주의의 하수 군부들의 제주 작전을 무력화시켜야 하겠습니다.”(http://blog.daum.net/munwooh/)


그러나 무장대의 기습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3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속에 토벌대 측의 사상자는 아주 적었던 반면, 무장대 측 사상자는 51명으로 매우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토벌대는 또 다시 그에 대한 보복으로 수용되어 있던 주민들을 다수 끌어내 보복학살까지 했던 것이다.

기습을 했던 무장대와 한 통속이라는 게 학살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자 중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감정적 학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증언자에 따라 이날 학살된 사람의 수는 각기 다르나 대략 80명 정도가 학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과 은신생활을 하다 붙잡혀 이곳에 수용됐던 고성호(남, 2004년 72세)씨는 ‘군인들이 교실에 주둔했고 주민들은 학교 뒤편 창고에 수감했다. 상당히 많은 주민들이 수감됐었다.’고 말했다.

1949년 1월 12일 이들 주민들을 구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 무장대의 습격이 있었는데 이 때 군인 4명이 전사했다. 군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용하고 있던 수십명의 주민을 집단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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