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17세기 관음보살상 봉안.. 백련사 관세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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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17세기 관음보살상 봉안.. 백련사 관세음보살상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9.24 0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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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 지역 포교 담당,적극적인 불법 홍포(佛法 弘布: 불교를 널리 알림)에 나서고 있다

김녕리 백련사 관세음보살상

 

위치 ; 구좌읍 김녕리 3959번지, 일주도로 남흘동 버스정류소 동쪽
유형 ; 불상
시대 ; 조선시대 추정

김녕리_백련사 대웅전

 

김녕리_백련사관세음보살상



백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의 말사이다. 백련사 정문에서 바다 쪽으로는 잘 정비된 용천수도 세 군데나 자리 잡고 있고 사찰과 용천수 사이 경작지에서는 무수한 기와편과 청백자편 및 옹기편이 발굴되고 있어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이곳이 고려 시대에 흥법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김녕리 사지로 소개하고 있다.


백련사가 이곳에서 구좌지역 불법 홍포의 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경이다. 1924년 제주 불교는 제주시내 관음사 포교소가 생기면서 전도에 걸쳐 더욱 왕성한 포교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부지역에 해당하는 구좌지역의 포교가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이에 안봉려관 스님과 상좌 목련 스님이 이곳 김녕리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백련사 앞으로는 일주도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과거에는 이 도로가 지나가는 곳에 백련사의 초가 암자도 있었다고 한다.


안봉려관 스님은 제주시에 보현사를 비롯하여 고산리 월성사, 옹포리 월계사, 함덕리 정토사, 김녕리 백련사, 조천리 고관사, 하원동 법화사 등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사찰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분이다.


이후 백련사는 1939년 사찰령에 따라 총독부의 계출인가를 받고, 새롭게 중창불사를 단행하며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 중창 불사가 한창이던 1941년 7월 15일, 백련사는 화사 김일섭 스님과 그 외 6인을 청하여 각단의 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일섭 스님은 금호당 약효, 보응당 문성을 이어받는 근대 시기 유명한 화승으로 조계사 대웅전 후불탱화를 조성하기도 했다. 1939년 시작된 이 중창불사는 1942년에 이르러 마무리되는데, 이때 기와로 된 목조건물 양식의 30평 규모 대웅전과 요사, 해탈문 등이 완공되었다.

또한 1942년 9월 12일에는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가서 당시 국보급 가치를 인정받던 미타존상을 이운 봉안한 후 주세불상으로 모셔 놓았다.

1946년에는 제주 의병 항쟁의 주역으로 알려진 김석윤을 비롯해 인수, 오영무, 이화선, 고선봉 등이 백련사를 이끌며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특히 이화선은 4·3사건이 끝난 후 1950년대 초에 17세기 관음보살상(사진)을 조성 봉안하였다. 이 보살상은 현재 백련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1960년을 전후한 정화 시기에는 박용봉이 주지로 재직하며 활발한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사세가 날로 번창하였다. 또한 후임으로 부임한 우경 역시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백련사 중창 불사를 단행하였다.


현재 백련사에는 17세기 관음보살상과 더불어 나무로 조각된 후불탱화가 대웅전 내부 상단에 있는데, 화려함과 장엄함이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백련사는 근대 제주 불교의 위대한 스승들의 자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찰로서, 현재까지 구좌 지역 포교를 담당하며 적극적인 불법 홍포(佛法 弘布: 불교를 널리 알림)에 나서고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100711, 보완 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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