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공신정 헐어 세운..일도1동 제주신명신사(濟州神明神社)터(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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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공신정 헐어 세운..일도1동 제주신명신사(濟州神明神社)터(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0.14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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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기상청 남서쪽에 붙어 있는 공터가 바로 제주신사 터라고 볼 수 있다

일도1동 제주신명신사(濟州神明神社)터(멸실)

 

위치 ; 제주시 일도1동 1186번지(만덕로6길32)
유형 ; 민속신앙건물
시대 ; 일본강점기

건입동_제주신명신사(1929년)

 

건입동_제주신사터



일제는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면서 각종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국 각지에 세운 신사(神社․神祠)다.

일제는 1군 1신사(神社)에 이어 1면 1신사(神祠) 원칙을 내세워 자신들의 조상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등을 모신 이런 신사를 면 단위까지 건립하도록 해 일제 말기에는 전국에 1000개가 넘는 신사가 세워졌다.

일제는 학생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한민족의 정신까지 침탈하는 식민정책을 펼쳤다.

神社는 일본의 고유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 또는 신령을 부르는 곳을 말한다.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도 사원(寺院)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신사참배(神社參拜)라고 한다.


원래 신사참배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천황제 국가를 확립시킨 일본은 초기 신도(神道) 국교정책을 거쳐 1882년부터는 제사와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신도 비종교정책을 추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하에 전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종교로서 출발한 국가신도에서 종교적 색채를 제거하고 이를 전국민적인 보편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신도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을, 국민을 계도(啓導)하는 관료로서 국가기구 내에 포섭하고 이들이 종교로서 신도행사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국가신도의 모든 시설과 모든 국가신도 종사자들의 활동을 제사집행에 한정했다. 이는 1889년의 제국헌법에 의해 명문화되었다.(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역사적으로 신사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도심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대규모 복합건물에서부터 눈에 잘 띄지 않는 길가의 소규모 기도소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지만 대체로 신사는 다음 3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① 혼덴[本殿 : 또는 신덴(神殿)] :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보통 신관(神官)만이 들어갈 수 있다. ② 헤이덴[幣殿 : 또는 노리토덴(祝詞殿)] : 신관에 의해 종교의식이 행해지고 기도를 올리는 곳인데, 이를 통해 가미[神]를 부르고 다시 되돌려보낸다. ③ 하이덴[拜殿] : 경배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규모가 큰 신사에는 가구라덴[神樂殿 : 의식무용을 추는 곳]·샤무쇼[社務所 : 신사의 사무실]·데미즈야[手水屋 : 경배하기 전 손과 입을 씻는 세면대]·고마이누[拍犬 : 수호동물의 상]·도로[燈籠 : 봉헌에 의해 세워진 석등 또는 청동등] 등과 같은 다른 구조물이 있기도 하다. 신사의 신성한 영역은 도리이[鳥居]라고 하는 출입문으로 구별되어 있다.(다음백과사전)


한국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신사는 1910년 전에는 일본 거류민들을 위해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하였지만,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하였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단 사립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의 실제 시행은 보류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대륙침략을 재개한 일제는,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여 광복 당시 한국에는 관폐대사(官幣大社)가 조선신궁 외에 부여신궁이 신축중에 있었으며 경성, 전주, 광주, 대구, 용두(부산), 평양, 춘천, 함흥의 각 신사는 국폐소사(國幣小社)였다.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69개라는 자료도 있음),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하여 각급학교 등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파와 거부하는 파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에는 순교자도 생겨났다. 카페 에덴미션랜드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1938년 4월26일 제9회 제주노회(장로교총회, 노회장 이도종 목사)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교회의 조직적 집단적 신사참배 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가 있었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는데,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 여 명에 이르고 2백 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일반인들도 일제의 강요에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하거나 가정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각 가정에 모시도록 행정기관을 통하여 나누어 준 ‘신궁대마(神宮大麻:가미다나에 넣어 두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도 바로 폐기하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밥풀·압핀 등으로 붙여두는 경우가 많았다.

1944년 가을 일제의 어용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충남지역 농가를 대상으로 이에 대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주민들은 대부분이 ‘왜놈의 귀신’, ‘일본의 귀신’이라 하여 이를 별도로 취급하거나, 방치 폐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감 때문에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대부분의 신사들이 민간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이들 신사는 대부분 8월 15~16일에 방화 파괴되었으며 그 터는 대부분 공원이나 학교·교회 등 공공장소로 이용되었다.(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던 신사는 광복과 함께 거의 철거되었으나 소록도 신사는 지자체가 직접 나서 과거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원형을 복원하고 안내판을 세우는 등 힘쓴 결과 2004년에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장생포의 신사는 기단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이 당시 행정편제상 전라남도에 속했던 제주도에는 14곳에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신궁이나 신사의 서열은 지금은 구분하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官幣大社>國幣大社>官幣中社>國幣中社>官幣小社>國幣小社>別格官幣社 순이었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신사가 지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14곳 모두 신사(神祠=神祇奉齊施設)로서 소규모의 신사(神社)였다고 할 수 있다. 제주신사는 1928년 일제가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펴기 위해 공신정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세웠다.(위 사진은 1929년 제주신명신사 전경. 사진 제공 고영자)


이 신사는 1945년 해방을 맞아 그 해 10월 24일 건입동 청년들이 부숴 버렸고(1996년 刊 『제주실록』), 한라일보(090105)에 의하면 그 후 적산관리업무를 맡았던 세무서가 이 터를 분할해 나누면서 지금은 감리교회가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사 터는 계속 공터로 남았다는 증언도 있으며 그 공터의 서쪽 담장이 신사의 담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제주기상청의 남서쪽에 붙어 있는 공터가 바로 제주신사 터라고 볼 수 있다.《작성 120909, 보완 1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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