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귤과 전복 가슴에 품고 난관천리..월평동 강한종 유적비
상태바
[향토문화] 귤과 전복 가슴에 품고 난관천리..월평동 강한종 유적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1.05 1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탁의 모반을 진압하는 데에도 공 세워 공신록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월평동 강한종유적비

 

위치 ; 제주시 월평동 1006-2번지. 제주중앙고등학교에서 동쪽으로 동산길을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휘는 길 다음 왼쪽으로 휘는 길 남쪽 동산 위에 있다.
유형 ; 비석(기념비)
시대 ; 조선

월평동_강한종유적비

 

월평동_강한종유적비(곰솔)


비문(정면) ; 朝鮮忠勳府 寧國原從功臣訓練院判官 晉州姜公翰宗遺蹟碑


비문을 요약하면 강한종은 선조38년(1605)에 태어났으며, 經史博通 武藝出衆하여 文武兩科를 俱全하였고, 제주목사 원숙(元䎘)이 禦邊之策을 啓稟하려고 하나 叛徒들의 蠢動으로 상경의 길이 막힌 정세하에서 인조21년(1643) 이 분을 啓狀上達特使로 임명하여 귤과 전복 등의 공물을 상달케 하였는데 육로에 이르렀을 때 흉적의 무리들과 조우하게 되자 수십인에 달하는 인솔관속들은 다 무서워 피하였지만 이분이 계장은 꼬아 허리에 묶고 귤과 전복을 가슴에 품고 난관천리를 헤쳐 7일만에 조정에 이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인조22년(1644) 심기원의 모반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동년 무과급제하였고, ○○만호, 훈련원판관을 역임하였으며, 유탁의 모반을 진압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그 공을 인정받아 영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忠勳府(지금의 보훈청과 같은 일을 하던 관청) 공신록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나와 있다.


〈선조38년(1605)∼현종9년(1668).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제주 월평(月坪)에서 강인홍(姜仁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혼란하여 도적들이 극성을 부리고 치안이 위태롭게 되자, 1643년(인조 21)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의해 조정에 계장(啓狀)을 전달할 특사로 선임되었다.

가는 길에 도적떼를 만났으나 격투 끝에 무사히 탈출하여 제주도의 위급한 상황 및 방어책을 품계(稟啓)하자, 인조(仁祖)는 그의 충성과 기개를 가상히 여겨 충의위사과(忠義衛司果) 벼슬에 제수(除授)되었다.

다음 해인 1644년(인조 22) 무과(武科)에 급제한 이후 소비포만호(所非浦萬戶)를 거쳐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다.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과 1646년(인조 24) 4월에 호서지방에서 유탁(柳濯) 등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아들은 강무준(姜武俊), 강문준(姜文俊), 강위준(姜渭俊), 강시준(姜時俊), 강영준(姜英俊), 강상준(姜尙俊)이다. 묘소는 제주시 조천읍(朝天邑) 교래리(橋來里)에 있다.〉


길에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설치되었으며, 비석 주변은 현무암으로 된 키 80cm 정도의 사각기둥을 세우고 쇠고리를 연결하여 보호시설을 만들었다. 문인석을 좌우에 세웠으며, 입구 가까운 쪽 좌우에 작은 망주석도 설치하였다.
《작성 13040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