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 특유의 방어유적.. 김녕리 환해장성2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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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 특유의 방어유적.. 김녕리 환해장성2구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1.06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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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해장성은 제주도 해안선 300여 리(약 120㎞)에 쌓은 석성(石城)을 말한다

김녕리 환해장성2구역
 

위치 ; 구좌읍 김녕리 462-13번지 일대 및 467-1번지 일대. 해맞이해안로130번지 일대 바닷가
시대 ; 고려~조선
유형 ; 방어유적(성)

김녕리_환해장성2구역 회곽도
김녕리_환해장성2구역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는 환해장성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에 축조된 고려 후기 석성이라고 정의하고,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군선과 상륙 군사들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고려 시대에 원종은 진도에서 제주도까지 거점을 확보하려는 삼별초 군사들의 작전을 막기 위해 고려 군사들을 제주에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환해장성은 그런 당시 상황 속에서 고려 군사들에 의해 축조되었다.


불과 2개월 후에는 삼별초 군사들이 제주도를 점령하고 여몽 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한 성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별초 군사들이 원종14년(1273)에 패전한 후, 철종5년(1854 ; 헌종10년(1845)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권즉(權莭)목사는 헌종10년(1844) 12월에 부임하여 헌종12년(1846)까지 근무하였기 때문이다. 철종5년(1854)의 제주목사는 목인배(睦仁培)이다.)까지 환해장성은 계속 수리, 증축되었다.


환해장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여몽 연합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 군사와 관련이 있으며, 전란 중에 전투적인 목적으로 고려 군사들에 의해 축조된 성이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여몽에 항거하던 삼별초가 강도(江都)에서 남하하여 진도에 이르러 주위가 3만 8,741자, 높이가 5자에 이르는 용장성을 쌓고 오랑(五狼)이라는 해상왕국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옛 장성은 연해 300리에 축조되었다. 고려 원종 때 반거한 삼별초가 진도에 머물렀다. 왕은 시랑 고여림에게 병사 1,000명을 주고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자 제주에 들어 온 고여림과 군사들은 삼별초 군사들을 대비하기 위한 장성을 축조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의 환해장성에 대해서는 1270년 삼별초의 입도와 관련된 기록이 있고, 김상헌의 『남사록』에 따르면 ‘바닷가 일대에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잇따라 이어지며 끊어지지 아니한다. 섬을 돌아가며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 쌓은 만리장성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845년 권직 목사 때 영국 사마랑호 영국 군함 사마랑호(samarang)의 출현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탐라기년』에 따르면, 철종5년(1854)에 “이상한 선박이 나타나 측량하며 지도를 제작하자 권직 제주목사는 놀라서 마병과 총수를 총동원하고 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저 양이와 힘으로써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싸우지 않고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몰래 싣고 접근하여 화약에 불을 놓아 양이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 권직 목사가 그 충의심에 감탄하여 우대하고 화약을 준비하고 날을 정하여 시행하려던 중 영국 배는 홀연히 돛을 달아 동북쪽으로 떠나가 버렸다. 권직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한다. 그 후로는 환해장성에 관한 기사가 없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환해장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축, 보수된 제주 특유의 방어유적이다.

원종11년(1270) 11월에 제주 지역을 점령한 삼별초 군사들은 원종14년(1273) 5월 패전할 때까지 18개월 동안 제주 지역에 있으면서 항바드리(항파두리)성을 축조하고 포구, 도로와 환해장성을 정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환해장성은 1845년에 수축한 것이다.

환해장성은 육지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한 군사적인 성이다. 석성으로서 허튼층쌓기의 형태이며, 배가 부른 궁형(弓形), 직선인 단일경사형(單一傾斜型)의 성벽이 있다.

성의 내·외벽은 잡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내부 역시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주요한 위치에는 성처럼 넓은 공간을 두어 주성 역할을 하던 곳과 협축에 가깝게 축조되어 보조성 역할을 하던 성곽으로 이루어졌다.

성의 안쪽에는 말을 타고 달리거나 도보를 이용하여 군사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회곽도(回廓道)를 둔 곳들도 있으며, 배수로(화북1동, 귀덕리에서 확인됨)나 안팎을 왕래하는 성문(바다로 출입하는 성문은 북촌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없어짐) 역할을 했던 곳도 확인되었다. 이 석성은 군사적인 목적 외에도 해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염분 피해를 줄이는 역할도 했다.

환해장성은 제주 지역 전역에 분포한다. 제주시, 서귀포시, 애월읍, 한림읍, 대정읍, 남원읍, 표선면, 성산읍, 구좌읍, 조천읍 등지에서 조사, 확인되었다. 환해장성의 전체 길이는 약 300리(120km)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형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는 곳 10개소(온평, 신산, 곤흘, 별도, 삼양, 북촌, 동복, 행원, 한동, 애월)를 제주도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수리 및 관리가 잘 이루어져 보존 상태가 양호한 반면, 지정되지 않은 곳은 훼손 정도가 심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환해장성에는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도 해안선 300여 리(약 120㎞)에 쌓은 석성(石城)을 말한다. 1270년(원종 11) 몽고와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를 하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가 용장성을 쌓아 항거하다 함락되자 탐라로 들어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조정에서 영암부사 김수와 고여림 장군을 보내어 성을 쌓게 하였다.〉

김녕리 환해장성 2구역은 김녕리 마을 동쪽 김녕해안도로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바닷가의 거대한 암반 위에 축조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굴곡이 심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전경초소 2개소가 환해장성과 인접해 있다.

높이는 2m 내외, 폭 1m 정도이며 남아 있는 길이는 약 400m인데 중간에 이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462-13번지 일대의 성은 밀물 때 물에 잠기는 선이 드러나 보이며 현대에 보수한 흔적이 없이 높은 곳과 허물어져 낮아진 곳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회곽도가 뚜렷이 구별되게 보인다. 그러나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 밝힌 것처럼 말을 달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김녕리 환해장성2구역은 2014년 현재까지 관청에서 발간된 자료에 수록되지 않았다. 복원하지 말고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만 해서 현재의 상태대로 보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작성 130407, 보완 150115, 1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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