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현식 전 편집국장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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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현식 전 편집국장을 추억하며....
  • 강삼
  • 승인 2010.10.1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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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을 가르쳐 준 우리들의 '아름다운 대장' 故 최현식 전 편집국장을 추억하며....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퇴직당한 몇 년 후 추석이 지나 날씨가 제법 찬바람으로 상쾌함을 더 하는 늦은 오후, 최국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추석도 지나고 날씨도 좋은 데 한잔 하지’ 였다.

교사 생활을 접고 제주신문 공채로 입사, 거의 매주 거르지 않고 술자리를 해 온 터라 너무나 쉽게 대답이 나왔다.

만났다.

신제주 늘 가는 순창갈비식당에 마주 앉은 그날 최국장의 모습은 그 특유의 백발과 새로입은 양복 구두등으로 돋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시키기도 전 하는 말.

‘어때 멋있지’였다.

프랑스 명품브랜드 양복과 국내 최고급 구두를 신은 최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양복자랑과 함께 반짝거리는 구두를 상 밑에서 끄집어 일부러 내보이며 하는 말.

‘건달은 구두가 좋아야 하거 든’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천진함과 함께 스스로를 ‘건달’로 치부하는 그 모습.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다.

그가 늘 술자리에서 하는 말은 ‘멋’이었다.

또한 ‘혁명은 낭만주의자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용(中庸)’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자 였다.

어떤 자리 어떤 상황에서도 ‘어울리는 멋’을 강조했다.

‘화(和)'를 설명했다.

그가 이끌었던 제주신문 편집국 16년의 ‘화기애애(和氣靄靄)’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당시 1개 일간지 밖에 없었던 시절의 유일한 편집국장으로서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는 ‘마음’이었다.

‘기자는 무엇보다도 까는 직업, 그러나 그냥 까기만 하면 깡패, 가슴이 따뜻해야 해’라는 말 끝에 그 방법을 그는 알려 줬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말은 그대로 뇌리에 살아있다.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휴머니즘’이다.

그는 그것을 실천했다.

그래서 ‘나누었다’.

설과 추석명절이 되면 외근기자들을 회의실로 소집한다.

기자들에게 할당을 하는 것이다.

내근기자들 떡값을 주기위해 외근기자들의 받은 ‘떡값’을 갹출하는 것이다.

그는 그 갹출된 돈으로 일일이 봉투에 넣어 내근기자들에게 나눠 준다.

그리고 자신도 가졌으나 그의 돈은 그날로 전부 날아간다.

기자들과 그날 밤 술을 먹고 ‘빈털털이’가 된다.

늘 ‘빈털털이’였다.

이튿날 출근을 한 후 기자들이 모두 점심을 먹고 회사에 들어 올 때까지 그는 혼자 편집국을 지킨다.

그래서 기자들이 들어오면 ‘누구 5천원 가진거 없어’였다.

점심에 ‘꼬리탕이 먹고 싶은 데 지금 내게 3천원 밖에 없단 말이야, 누구 있으면 꿔줘, 내일 갚을 게’.

물론 지금 글을 쓰는 후배도 역시 몇차례 ‘그 5천원을 꿔 줬으나 받은 기억은 없다.

그처럼 그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하는 말은 ‘나는 돈 1백만원만 수중에 있으면 이세상에서 가정 부자야’였다.

실제 그의 수중에 평생 1백만원이라는 몫돈을 순전히 자기가 쓸 수 있는 돈으로 가져 본적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돈이 남아 있을 시간이 없다.

어디 쓸 구실을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추석이 지난 며칠후 술자리를 갖자는 제의전화를 먼저 한 것도 다시말해 ‘술값이 내게 있다’는 뜻이었다.

딸들이 마련 해 준 새양복과 새구두 얘기를 시작으로 시작된 술자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로 어둑해 지고 밤시간이 꽤 깊어졌다.

이제 술자리를 끝내고 댁이 있는 시민회관쪽으로 가려는 참에 ‘택시를 타지 말고 오늘은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가 한잔 더하고 헤어지자’는 의견으로 일치를 봤다.

100번 좌석버스를 탔다.

마침 두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여서 그 자리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화제는 이어졌다.

술자리에서 했던 화제가 이어지면서 큰소리가 나고 웃음소리가 나고...

갑자기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면서 ‘좀 조용히 하시요’라는 명령조의 큰소리가 들려 왔다.

당장 다툼이 벌어졌다.

운전기사는 바로 파출소로 차를 몰았다.

물론 ‘훈방’조치 됐지만 그는 그를 무시하는 태도에는 참지 못하는 ‘자존심 덩어리’, 그 자체 였다.

그는 그자존심으로 ‘일생’을 살았다.

어디가서든 머리를 숙이지 않는 자존심.

그는 그만큼 청렴했다.

돈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날 술자리에서 최국장은 나에게 은근한 한 말을 했다.

20년동안 나를 따라 준 ‘연인’에게 무엇인가 하나를 마련해 줘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드디어 그는 식구 몰래 ‘집문서’를 들고 은행을 찾았다.

2천만원을 꾸기로 한 그는 담보설정기일이 이틀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돌아 왔다.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 이틀동안 은행측은 익히 알고 있는 최국장이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대출이 됐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부인은 놀랐다.

집을 아무리 찾아도 집문서가 사라진 것이다.

부인이 급히 은행으로 가 그 사실을 알고 대출을 취소, 집문서를 회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물론 무산됐다.

그러나 그는 ‘연인’에게 주기로 한 ‘돈약속’을 지키기위해 자신이 ‘묘터’로 마련해 놓은 땅을 기어히 팔고 말았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 한경면 신창성당 공동묘지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그는 후회는 없다.

비록 ‘집문서 소동’으로 부인으로부터 엄한 핀잔을 받았으나 부인은 정작 그 ‘연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밖에 나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식들에게 까지도 하지 않았다.

동네 아주머니가 그 ‘연인’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말을 전하려다 ‘왜 남의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려느냐, 그럴거면 앞으로 우리집에 오지말라’는 핀잔을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함 속에서 부인의 지극한 정성을 받으며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어쩔수 없이 제주도로 내려와 정착한 당신.

어머니가 어릴 때 ‘푸른물이 있는 물가에서 청색저고리를 입은 처녀를 만날 것 같다’는 꿈얘기를 듣고 운명적으로 제주도 애월 하물에서 부인을 만나 함께한 그는 다분히 운명론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당신을 우리 후배들은 낭만을 가르쳐 준 '아름다운 사람’으로 입들을 모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낭만을 가르쳐 준 '아름다운 사람.

‘현초(玄樵)’ 최현식(崔玄植)‘.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실감이 이제야 납니다.

그렇다면 ‘이자필회(離者必會)’도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 가셔서 좋은 ‘단골집’이나 하나 마련해 놓으십시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요.

제가 사업하다 망해 빈털털이가 됐을 때 '괜찮다'며 저녁소주를 먹고 헤어지는 나의 손에 세겹으로 접어 쥐어 준 5만원어치 술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올 때까지 우선 인사드립니다.

아름다운 '대장’, 안녕히 가십시오.



(출처 = 제주인터넷뉴스 강삼 발행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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