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위리안치..보성리 동계정온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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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위리안치..보성리 동계정온유허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4.20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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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이치를 터득하는 모습이 꼭 "새벽 창이 점점 밝아오는 것과 같다"


보성리 동계정온유허비


보성리 동계정선생유허비 桐溪鄭先生遺墟碑
위치 ; 대정읍 보성리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
시대 ; 조선
문화재 ; 비지정

 

 

▲ 경남_거창_정온생가

▲ 보성리_동계정선생유허비

정온(鄭蘊 1569∼1642)은 광해군 때 제주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생활하다가 인조반정으로 유배가 풀려 출륙한 사람이다.

문관으로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휘원(輝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아버지는 정유명(鄭惟明)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대표적인 관직은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이다.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높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이었다.


동계 정온은 선조 2년(1569) 안음현 역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학문에 입문하자, 처음에는 어눌하여 잘 외우지도 못하다가 하루 종일 괴로움을 참아가며 외우려고 노력하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학문의 이치를 터득하는 모습이 꼭 "새벽 창이 점점 밝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며 기특하게 여겼다.

정온은 15세에 아버지의 스승이자 광주목사를 지낸 갈천 임훈 선생을 처음 뵈었는데, 선생은 정온을 보고 "훗날 공을 이루는 것이 과거에 급제하는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고 예견했다.


정온이 24세(1592)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왜란에 대비할 상소를 즉각 올렸고,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 군대를 맞아 사민(士民)을 모아 위로하였다.

29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난중이라 아버지를 급히 선영에 묻었다. 왜구들이 점점 가까이 오자 이듬해 상복을 입은 채로 어머니를 모시고 영·호남의 산중으로 피신하였고, 그 와중에도 음식을 제때 잃은 적 없게 하였으며, 잠자리를 불편하게 해 드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2년 동안을 피난 생활하며 타관객지를 떠돌았지만 아무 탈 없이 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셔올 수 있었던 것은 효성이 지극한 까닭이다. 평시에도 늘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경사를 읽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제민일보 110722 김유정 글)


선조39년(1601년)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광해군2년(1610)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6년(1614)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났음을 상소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할 것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정온은 광해군에게 직격탄을 날리면서 인목대비에게 효도를 다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만회하고, 간사한 자들을 물리치라고 촉구했다.


동계 정온은 원래 광해군의 권력기반이었던 북인에 속했다. 그런데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스승인 정인홍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과 그 권력 기반이었던 대북의 미움을 사서 유배된 것이다. 북인이면서 서인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참고로 정인홍에 대해서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나 향교의 유생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산림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정규군이 아닌 의병으로 참전하는 것이다. 정인홍은 이 의병활동으로 인해 향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정인홍은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역적이 돼 참형되었고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 돼 조선 왕조 내내 신원이 복권되지 않는 비극을 겪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정인홍을 두고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대장이 적격이다."라고 평한 것으로 유명하다.(제민일보 110722 김유정 글)


보통 갑인봉사(甲寅封事)라고 불리는 정온의 이 상소는 조정 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광해군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북파들은 정온의 상소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들은 ‘영창대군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이므로 누구나 죽일 수 있다. 정온은 정인홍에게 배웠지만 정인홍의 도의는 배우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정온을 유배시키라고 촉구했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전반적인 조정의 분위기가 정온을 극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돌아가는 와중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우의정 정창연, 간관인 이언영 강대진, 호남유생 송흥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했다.

그나마 이원익 등의 비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어 1614년 8월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유배형)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까지 10여 년간을 이곳에서 지내게 된다.


정온이 유배되었던 제주도 대정현은 조선왕조가 절도유배지(絶島流配地)로 지정한 6개 지역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었다. 1612년(광해군4)의 기사를 보면 제주, 정의, 대정, 진도, 거제, 남해가 절도유배지로 이용되고 있음을 밝히고 이외에는 절도유배지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정온의 유배생활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대정현 동문 안에 위리된 내력을 적은 기문(大靜縣東門內圍籬記)’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온은 자신의 유배지 제주도 대정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한라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1백여 리를 뻗어가서 둘로 나뉘어 동·서의 양 산록이 되었는데, 동쪽에는 산방악과 파고미악이 있고, 서쪽에는 가시악과 모슬포악이 있다.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파고가 용의 형상이라면 가시는 호랑이 형상이다. 황모가 들에 가득하고 바다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외딴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정현이다.”


정온은 제주도 대정현에서 거처했던 곳의 위치와 위리안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현에는 객사가 있고 그 객사의 동쪽이자 성의 동문 안에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수십 보쯤 떨어진 위치에 울타리를 둘러친 데가 바로 내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곳은 전에는 민가였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태수가 이 집을 비워 두도록 했다가 나를 거처하게 한 것이다.”


“북쪽, 동쪽, 남쪽 3면은 모두 처마에 닿아서 하늘을 전혀 볼 수가 없고 서쪽에서만 볼 수 있으니,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울타리 안에 동쪽과 서쪽은 항상 한 자 남짓 여유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3분의 2가 되는데 남쪽을 향해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 옆에는 작은 구멍을 만들어 두었는데 음식을 넣어 주기 위한 것이다. 둘러쳐 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금오랑이 관대를 갖추고 교상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하였다.

울타리 서쪽에 작은 사립문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전례가 그러하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자경담」을 지었고, 덕변록·「望北斗詩」(망북두시)·「望白雲歌」(망백운가)를 지었다. 「망북두시(望北斗詩)」와 「망백운가(望白雲歌)」를 통해서는 애군우국(愛君憂國)을 토로하였다. 해배 후에 『동계집(桐溪集)』을 남겼으며 덕유산에 은거하며 『속근사록(續近思錄)』을 찬집하려 하였으나 끝마치지 못했다.
 

위로는 은나라 말기부터 아래로는 남송까지 경사에서 뽑고 전언에서 채록하여 그 기간의 성현 중에서 곤액(困厄)과 우환 속에서도 마음이 바르고 생각이 깊어 정도를 잃지 않았던 59인을 편집한 것이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이 속칭 ‘막은골’에 서재용으로 지어준 두 칸의 집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쳤고, 지방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고 애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유배된 송상인(宋象仁)·이익(李瀷)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였다.


위리안치라고는 하지만 유배인의 행동범위를 실제 울타리 안으로 제한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많은 제주도 유배인들은 현지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특히 그들을 대상으로 교학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정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온이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던 교학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은 찾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다만 정온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독서에 주력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조선중기 학자로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던 허목이 쓴 정온의 행장(行狀)에는 “항상 글을 읽었다(常讀書)”고 언급하고 있다.(제주일보 110726 양진건 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을 때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비리와 병권 장악을 공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당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비는 1842년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정온의 적소였던 막은골에 세운 것이다. 동계 정온이 제주를 다녀간 지 약 200년 후 제주에 유배되었던 추사 김정희는 병자호란 당시 정온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비를 세울 것을 당시 자신과 친분을 유지했던 제주목사 이원조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동계정온비를 건립하게 한 것이다. 다음 해에는 송죽사(松竹祠)를 건립하여 정온의 넋을 기렸다. 송죽사의 현판은 추사가 썼다고 한다.(카페 경산유림문화연구소, 제주일보 110726 양진건 글)

전면에는 '桐溪鄭先生遺墟碑'(동계정선생유허비)라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높이는 120cm, 너비 61cm, 두께 18cm이다. 좌측면에는 '看役接生 姜瑞瑚 柳宗儉'(간역접생 강서호 유종검), 뒷면에는 '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夫知縣宗仁因其址闢書齋 居儒士夫土人爲政而知所先後可嘉也余 州首謁 先生于橘林祠修邑誌得 先生一律詩一跋文表而載之又命工竪石於其墟鳴呼先生德義名節與天地竝立齋之謫生能知愛護玆石於爲士也無愧余於 先生外裔也慕 先生公耳何敢私 崇禎後四壬寅星州李源祚 謹書' 우측면에는 '監董 前 同知 李仁觀 別監 金鼎洽'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현종9년(1668)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하였으며, 이외에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963년 대정 지역 칠성계가 중심이 되어 정온의 비석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에 있는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77년에는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정온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 50-1번지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양진건)(제주일보 110726 양진건 글)
《작성 041024, 보완 120119》

동계 정온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cafe.daum.net/jejuhistory?t__nil_cafemy=ite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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