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2번 사용..송당리 귀빈사(貴賓舍 이승만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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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2번 사용..송당리 귀빈사(貴賓舍 이승만별장)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 승인 2017.10.1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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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국립목장설립 지시..송당목장 운영난으로 민간이양

송당리 귀빈사(貴賓舍 이승만별장)

 


문화재 지정사항 ; 국가등록문화재113호(2004년 지정)
귀빈사 貴賓舍
위치 ; 구좌읍 송당리 산156번지 송당목장내 민오름 기슭
유형 ; 옛 건물
시대 ; 대한민국(1957)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1957년과 1959년 두 번 사용했던 별장이다.

이 대통령이 국립목장의 설립을 지시하면서 내도가 잦아지자 측근들이 전용숙소로 제공하기 위해 1957년에 건립한 이 별장은 일반인에게는 송당별장 또는 이승만별장으로 불리고 있으나 관리가 허술한 상태이고 공개되지 않고 있다.

별장의 설계는 미국에서 담당하고 국군공병대가 독일제 자재를 사용하여 시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송당목장의 운영난과 함께 1963년 민간에 이양되었다.

43평의 단층건물에는 당시 이대통령이 사용했던 5평 정도의 침실, 응접실, 벽난로, 원형식탁, 의자, 소파, 침대, 화장대, 수세식변소와 욕조, 주방세트, 냉장고, 가스렌지 등을 비롯하여 16종류의 비품들이 보관되고 있으며 벽에는 태극기와 이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최근 북제주군에서 복원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방안을 검토중이다.(제민일보 950211, 제주신문 950212) 현관 앞 바닥에는 황소가 그려져 있어 목장에 대한 이승만의 의지를 나타내 주고 있으며, 건물 외벽에는 喜자 2개가 새겨져 있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과 벤 플리트(제주일보 130514 현태용 글에 따르면 밴플리트는 퇴역 후 실제로 캘리포니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UN사령관의 제주 방문시 축조하기로 협의하여 미군의 자재 지원을 받으며 국군 공병대가 축조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벽돌조 박공지붕 형태의 지상 1층 건물로, 연면적이 99㎡인 소규모 귀빈 숙사이다.

미국식 정원형 단독 주택으로 건물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국가 원수가 거주했던 곳의 주거사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입식 구조, 식당과 침실이 분리된 내부 공간, 인테리어 등 이국적인 건물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6·25전쟁 이후 미군을 통해 미국식 주택 건축 양식과 기술이 전해져 온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고, 국가 원수와 관련된 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동전) 원래 명칭은 귀빈숙사였는데 귀빈사로 변경했다고 한다.


입식생활을 전제로 계획되어 벽난로가 있는 거실, 식당과 부엌 등이 외부 공간으로 직접 연결되었으며, 실 배치가 기능적으로 계획되어 있다. 거실 외부 발코니 공간을 피로티로 처리, 거실-발코니-정원으로 이어지는 등 상당히 서양적인 건축 개념이 적용되었다.

입면처리는 제주의 돌을 사용, 제주적인 건축요소로 표현했고, 거실 외부 공간의 발코니 바닥 부분이나 외벽의 일부에는 돌을 이용하였고 거실 앞 외부 발코니 계단에도 작은 돌을 이용하여 요철 무늬를 구성함으로써 제주적인 의장과 한국적인 의장요소가 적절히 표현된 세련된 디자인이다. 공간 계획이나 입면 계획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김태일 강의)


1960년을 전후하여 제주도내 초등학생들이 수학여행 때 들러서 이승만 대통령을 칭송하는 설명을 듣던 곳이기도 한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면에서 이경선과 김해 김씨 사이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손위로 누이 2명이 있었다.

태몽이 용꿈이었기에 아명은 승룡(承龍)이었다. 전주 이씨로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으나, 7대조 이후로 몰락하여 이승만 이전 4대 내에 생진시(生進試) 합격자가 없는 상태였다.

부친은 평생 가족의 생계를 돌보지 않고 양녕대군의 후손 가운데 유력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등 방랑 생활을 했다. 몰락한 가문이었지만, 이승만은 왕족의 후예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미국 유학 시절 자신을 이씨 왕가의 왕자로 소개했고, 대통령 시절 자신을 ‘과인’(寡人)이라고 부르고 ‘나의 백성들’이란 용어 등을 즐겨쓰며 왕족의식 혹은 군주의식을 내비쳤다.


국제적인 힘에 의해 탄생된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반드시 국제적 승인을 받아야 했다.


고영철 생각 ; 미국의 힘에 의해 이승만이 선택된 것이다. 미국의 말을 잘 들을 사람으로 이승만을 선택한 것이지 그의 독립운동 경력이나 정치적 능력을 보고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의 결정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완전히 훼손되었다. 일본정부의 훈장까지 받은 친일경찰의 대표자였던 노덕술을 서울시경 수사과장까지 올려주었고, 그에 보답하듯 노덕술은 잔혹한 고문치사, 반민특위요인암살의 주모자가 되었다.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분자로 체포되자 이승만은 경무대로 특위 위원들을 불러 '대공수사의 기술자'인 노덕술의 석방을 노한 목소리로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어서 반민특위 소속인 특경대도 이승만이 해산하였다.

결국은 반민특위법마저 폐지되고 그 법에 의해 검거된 사람들은 공소가 취소되고 판결을 받은 사람도 모두 효력을 상실(경향신문 141103)하고 말았는데 이 모든 것은 이승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건국대통령이니까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가 아니었으면(특히 그가 암살, 제거한 정치지도자들 김구, 여운형, 조봉암, 김규식, … 등등. 그들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더 훌륭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을 것이고, 매국노의 재산반환소송 같은 것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제주4.3사건 당시 수만명의 양민이 희생된 데는 그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는 일민주의를 국시로 내세웠는데 이 속에는 ‘반공, 민족, 민주’라는 원칙에서 제시했으며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라고 했다. 이를 방해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거’ 대상은 반이승만 세력이었다. 제거의 수단은 ‘반공’이었다. ‘반공’만 남고 ‘민족과 민주’는 구호만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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