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현무암,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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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현무암,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2.02.02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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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노리 추상조각 1세대 한용진 조각展

 
 

 

 

갤러리노리(관장 김은중)가 저지예술인마을에 개관한지 벌써 일 년.

 

개관이래 10회의 기획. 초대전을 진행해 온 갤러리노리가 2012년 임진년에 들어서 첫 기획초대전으로 조각가 한용진 선생의 제주돌 조각전을 4일부터 3월5일까지 갖는다.

한용진 선생님은 1964년도 이후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추상조각의 1세대.


조각가 한용진이 저지예술인마을에 6개월 동안 체류하며 제주 현무암으로 제작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50여년 가까이 돌과 대화하며 제작한 진실한 예술혼이 담긴 작품들로 노장의 경건한 삶이 배어 있는 감동적인 작품들이 조각애호가들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의 소개글이다.
 

 

한용진의 제주 돌 조각전: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

조각가 현용진
1.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가 직역(直譯)인 ‘마전작경(磨磚作鏡)’은 선(禪)불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두 가운데 하나다. 뜻밖에도 이 말만큼 한용진(韓鏞進) 형이 제주에서 2011년 9월부터 반년동안 매달렸던 돌조각 작품의 조형성을 실감나게 말해줄 일화(逸話)도 없지 싶다.


일화는 고승(高僧)들이 문답을 주고받았던 중국 당나라 시절로 올라간다. 벽돌은 아무리 갈아도 벽돌일 뿐, 거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선문답의 일차 해석이다. 그래서 성불(成佛)하자면 벽돌 등 엉뚱한 것을 붙잡을 게 아니라 제대로 갈피를 잡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화두 해석의 정설이라 한다.


선문답은 정반(正反)의 뜻을 동시에 담고 있음도 묘미다. 앞의 해석과는 전혀 다르게,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면 벽돌을 갈아서도 거울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쇠몽둥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듯, 지성이면 감천이다.


제주의 화산 돌은 구멍이 숭숭 난 석질로 말미암아 도무지 현대조각이 될 것 같지 않다. 흙뭉치 같아서 고작 풍다(風多) 제주의 맹렬 바람을 이기는 집 돌담이나 무덤 산담에 알맞은 재료로만 보인다. 그걸로 굳이 입체를 만들라치면 듬성듬성 다듬은 돌하르방이나 무덤 앞 동자석(童子石)이 고작이다. 거친 조형물일망정 질긴 민간신앙이 마을이나 무덤의 수호신으로 믿어준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다.


제주 돌은 신라가 불상을 만들던 강질(剛質)의 화강석도 아니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이나 피에타 상을 만들던 연질(軟質)의 대리석도 아니다. 잘 다듬어놓으면 마침내 덩어리 안의 숨겨진 아름다움이 들어났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돌이 아니란 말이다.

2.
숭숭이 제주 돌이 현대조각의 소재로 다뤄진 적은 없었다. 그런 형편에서 여다(女多)의 고장답게 제주문화 현창의 새 돌파구 열기에도 관심이 높은 여성 민속전문가가 조심스럽게 제주 돌로도 현대조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를 타진해왔다. 그 인연이 닿아 드디어 한 형에게 작품 제작의 기회가 주어졌다.


도전이라면 도전이었다. 일단 해볼만하다고 한 형이 마음을 굳히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석, 화강석, 마천석 등 단단하면서도 결이 일정한 돌을 주로 다뤄온 전력이긴 해도, 실은 그 사이 조각용으로 쓰인 적 없는, 산야에서 우연히 만난 돌에 대해서도 유심(有心)한 눈길 주기를 한 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 앞을 걷다가 길가에서 대야 크기의 넓적한 둥글납작한 돌에 눈이 만나자, 나는 그걸 갖고 뭘 할까 싶었음에도, 굳이 그걸 안고 가겠다했다.


그 관심의 연장선에서 이전에 고작 화단 경계용에 불과한 석재(石材)를 갖고도 대형 작품을 만들었다. 1999년 중반부터 약 일 년 동안 경기도 수원의 ‘이영(利瑛)미술관’ 초대로 10여점 대형 돌조각을 제작한 적 있었다. 예와 같이 주로 화강석을 작품 재료로 사용하는 한편으로, 막무가내로 뻗어가는 실험정신이 발동한 덕분에, 조각가가 ‘막돌’이라 이름 붙인 잡석으로도 작품을 제작했다.


교통체증이 난 고속도로변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만난 돌이었다. 흰색, 회색, 초록색이 얼룩처럼 줄지어 박힌 그 돌을 도로 경계용 부자재로 사용한 적 있는 건설업 경력의 미술관 관장에게서 이전에 어느 작가도 작업한 적이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잡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말에 더욱 호기심을 느껴 돌 생산지를 물어 찾아서 충남 아산에서 큰 돌덩어리를 구했다.


결이 자유분방한 것이 바로 한국인의 심성이겠구나 싶었던 돌을 두드려본즉, 석질이 아주 묘했다. 한쪽을 두드리면 전부가 쩍 갈라지는 화강석과는 달리, 낯선 돌은 석질 구조가 다층적이었던 탓인지 질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직접 쪼아보았다. 부딪치는 손맛이 여간 묵직하지 않았다. 이런 걸 즐기기가 바로 당신의 체질이지 싶었다.


우선 ‘막사발’이란 낱말에서 기분 좋게 기억해왔던 터에 ‘막’이란 접두어를 그 무명의 잡석에 갖다 붙여 막돌이라 이름 붙였고, 한 술 더 떠서 그걸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런 내력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닌 것도 한 형 스타일이었다.

 


3.
한용진 조각은 그 형태가 한마디로 대범하다. 이 점에 대해선 인문적 안목도 도저(到底)한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崔明) 명예교수의 소견이 설득력 있다. 1994년 말 갤러리 현대가 연 개인전을 보고 한마디 적었다. “한 용진의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날렵하게 보이지만 육중하고, 작게 보이지만 크다.”고.


그 대범 속에서도, “크게 교묘(巧妙)함은 투박함과 통한다(大巧若拙).”는 말처럼 노자 등 동양사상 일각에서 말하는 “반대의 일치”를 실감하도록, 섬세한 디테일을 구사하는 것이 한 형의 작업방식이다. 이를테면 그냥 길쭉한 돌 토막처럼 생겨 애호가들이 다듬잇돌이라 말하는 작품의 몸통 쪽은 그냥 미끈한 평면으로 처리하지만, 토막의 양쪽 끝은 긴 돌기둥이 부작위(不作爲)로 떨어져 나갔음을 보여주려고 아주 섬세하게 다듬는다. 그렇게 몸통 부위의 단순함과 양쪽 끝 부위의 정치(精緻)함이 어우러진 반대의 일치가 바로 한 형의 작품 스타일이다.


문제 상황은 그 다음이다. 대범 속에 숨어진 정치함을 제주 돌로 어떻게 구현한단 말인가. 한 형의 작품에서 오래 동안 안복(眼福)을 누려왔던 나도 무척 궁금했다. 작년 11월 초, 제주 저지리 예술인촌에서 자동차로 오 분 거리 작업장을 찾았다.


돌하르방을 만드는 제주 토박이 작업장 한 귀퉁이에 마련한 더부살이 작업공간이었다. “처음엔 구멍이 숭숭 난 제주 돌을 갖고 마음먹은 대로 조각 표면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다듬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짙은 검은 색 바탕 평면은 밤하늘이고 그 숭숭 구멍은 그대로 밤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그리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벽돌을 갈아 마침내 거울을 만들었다는 득의의 웃음이었다. 이런 작업방식을 두고서 최 교수가 “그의 돌은 석(石)이 아니라 석(碩)”이라 했던가. 발음은 같아도 후자의 석은 ‘클’ 석이요 ‘충실할’ 석인 것이다.


그의 웃음은 깨침의 웃음이기도 했다. 제주의 미학(美學)을 새롭게 꿰뚫어보는 웃음이었다. 그렇다. 한 형의 조각은 제주 돌이 단지 돌하르방 등 민속 조각 구실로만 머물지 않을, 새 경지를 물증해준 것이다. 예술문화 혁신의 돌파구를 보여준 작품들이 아닐 수 없었다.


반세기전 한라산 등산길에 내가 처음 만났던 제주는 한마디로 ‘오지’ 또는 ‘낙후’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던 그런 땅이었다. 삼다도가 석다(石多)의 섬이기도 하듯, 무엇보다 지질(地質)상 불모라 싶을 정도로 물이 귀한 땅이었다.


그런 곳이 세계적 관광지로 국내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오늘의 제주로 태어난 환골탈태의 결정적 계기는 무엇보다 한라산 땅덩어리 밑에 보물처럼 고여 있던 최(最)양질 물을 길러먹고부터라 나는 믿고 있다. 그 명수(名水)를 넉넉하게 이용하면서 제주가 석다의 땅이면서도 동시에 물기가 촉촉한 ‘수다(水多)’의 비옥한 땅으로 변신했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형이 화산 돌로 현대조각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석다의 땅이 ‘예다(藝多)’의 고장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새 지평을 보여준 기념비적 시범이지 싶다.

4.
오늘의 현대미술판은 온갖 주의가 난무하고, 갖가지 유파가 백가쟁명한다. 이 판을 바라본 한 안목가의 성찰(省察)은 나에게도 큰 공감이었다. “아티잔(artisan, 장인)이 되어 보지 못했던 아티스트(artist, 예술가) 작품은 신뢰하지 못한다.”고. 조형성을 표출할 수 있는 기초 실기능력을 튼실하게 갖춘 이가 손맛을 보여주는 비구상이야 말로 실감이 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이를테면 뉴욕에서 한 형이 오래 교유했던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를 감상할 때도 내가 항상 기억해내는 기준인 것이다.


수화의 뉴욕 시절 그림은 이른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한 전형이다. 단순한 모티프의 지루한 연속이다. 한두 점만 보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럼에도, 나만 그런지 몰라도, 수화 그림이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제작했던 한국 정서가 물씬 풍기던 구상화의 모티프가 겹쳐 연상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뉴욕시대 그림의 ‘점점(點點)’은 백자 항아리, 달, 구름, 나무 등 그가 사랑했고, 나중에 우리가 그 사랑을 따라 배웠던 정겨운 우리 향토 소재가 “알알이 베인” 조형이 아니었던가.


기실(其實), 수화가 자신을 한평생 장인이라 자처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한 형에게서 들었다. 전통목기에도 안목이 깊었던 수화가 한 형에게 들려준 이야기인즉, 우리 옛 소목장은 오동나무를 자르고 나면 잎사귀도 마저 모아 푹 곤다 했다. 그 물을 나무 판재(板材)에 정성스럽게 골고루 먹여야만 속과 겉이 같은 색감의 오동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소목장 이야기를 수화가 인용하는 것은 분명 자신의 작업이 그걸 닮고자한다는 뜻이었겠다. 그 이야기를 한 형이 되풀이하는 것 또한 자신의 작업방식에 대한 다짐이 아니었겠는가.


1999년 중반부터 일 년 넘게 조각가의 작업 진행을 사진으로 기록하던 강운구(姜運求) 형은 무엇보다 거창한 돌 작업을 제 손으로 모두 다듬는 작업방식에 감탄했다. 사진을 찍다 말고는 “한 형 말고 돌 작업을 모두 제 손으로 해내는 조각가가 이 땅에 있다면 한번 나와 보라 하겠다.”고 단언했다. 돌을 안고 이리저리 주무르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지 않아도 돌을 만져 무척 거칠어진 우람한 손만 보아도 그의 작업방식이 금방 짐작된다.

 

5.
“미술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 했다.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인데, 이는 한 형이 마음으로 따르던 서양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말이었다.


그의 작업 역시 지금까지 나름으로 스스로 일구어온 바라 하겠다. 그럼에도 한 형을 말할 때면 조각에 입문한 이후로 삶의 준거로 삼았던, 한 결 같이 우리 현대 미술사를 빛낸 사표들이 연상됨은 어쩔 수 없다.

중학시절 조각 입문의 계기가 되어준 이는 해방 직후 애국자 김구(金九)의 동상을 만들기도 했던 민족주의자 박승구(朴勝龜, 1915-1990?)였고, 대학에서 만난 스승은 우리 현대추상조각의 비조 김종영(金鍾瑛, 1915- 1982)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림, 조각 등으로 편으로 가르지 않고 교육시키던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서양화과의 장욱진도 만났고, 미국 뉴욕에서는 김환기와 깊이 교유했다.


나중에 월북한 박승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나머지 세 분은 하나같이 예술지상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개결(介潔)한 인품의 전형적 선비들이었음은 직간접으로 나는 익히 알았고 또한 들었다. 내가 굳이 그의 스승들을 들먹이는 것은 망(望) 팔십 노경의 한 형에게서 풍기는 맑디맑은 인간미에 대해 더 이상 또는 달리 말할 길 없어서다.


“그 사람에 그 작품”이라 했다. 나는 그 사이 인품과 작품에 매료되어 힘닿는 대로 그의 작품이 놓인 외국 현장을 찾았다. 2000년 7월, 북구(北歐)쪽 건축기행에 따라나섰다가 마지막 경유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일행과 떨어져 기차로 세 시간 거리 헤어닝(Herning)을 혼자 찾았다. 예술과 산업의 상관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곳 기업가의 후원을 받아 1966년에 현지에서 제작한 작품 두 점을 그곳 미술관에서 만났다.


하나는 강화 플라스틱, 또 하나는 브론즈 작품이었다. 전자는 기계의 냄새가, 후자는 생명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절대가난 나라의 출신이 미술을 크게 후원하는 문화적 여유의 선진국에서 작업하며 느꼈을 착잡한 심경에 대한 위로의 뜻으로 작품 앞에다 덴마크 소주 한잔을 뿌렸다. 그리고 나도 한 모금 음복(飮福)했다.


2002년 여름에는 북미의 명산 샤스타(Shasta)가 멀리 장엄하게 바라보이는 북 켈리포니아의 소읍(小邑) 레딩(Redding)을 찾았다. 대성한 한인(韓人)의사의 저택용으로 우람한 돌조각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일군(一群)의 작품은 나중에 레딩 시에 일괄 기증되어 시민들이 두루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도심의 공원으로 옮겨졌다.


1982년 일본 동북부 이와테겐(岩手縣)이 주최한 제 10회 ‘국제석조(石彫)심포지움’에 참가해서 제작한 조형물은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껏 잘 보존되어 있다는 신문 기사는 보았지만, 한 점 제작이라서 달랑 그 배관(拜觀)은 아직껏 미루고 있다.


모국에서 펼친 현장 작업은 수원의 이영미술관이 제일 먼저다. 그리고 2007년 봄부터 역시 일 년 동안 서양화가 김종학(金宗學)의 설악산 화실 마당을 꾸미는 작업을 펼쳤다.


설악산 일은 사연이 많았다. 당신 아내 문미애(文美愛) 서양화가가 2004년에 앞서 떠나자 한 형은 그 충격으로 꽤 오래 동안 심기를 추스르지 못했다. 염려한 주위가 기력을 되찾자면 마땅한 일이 있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두 내외와 피붙이처럼 절친했던 김종학 화백이 그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한 형의 다짐은 비감했다. “예술에도 삶과 죽음이 있다 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을 전․후반으로 나누어 살피는지 모르겠다. 미애는 나에게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작업은 앞으로 더욱 해볼 만할 것이다.”

6.
죽음을 간접체험한 뒤의 작업인 점은 제주 작업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로렌스(D. H. Lawrence)는 성(性)의 경지를 우리 일상으로 끌어내려서 보여 주었다. 현대조각도 그런 경지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 말대로 갈아도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은 벽돌 같은, 고작 돌담이나 쌓을 허투루 돌도 잘 다스리면 구안(具眼) 인사들에게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보여줄 수 있겠다는 예감이었던가.


인터넷 블로그는 경남 진해에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 상호의 카페가 있다고 알려준다. 10년째 가게를 운영한다는 주인은 손님들이 의미를 궁금해 하지만 남에게서 인수했던 탓에 “불교에서 나오는 말”이란 말 말고는 달리 답해주지 못 한다.


주인이 선불교 화두의 내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전심(全心)으로 가게를 꾸려가는 중이라면 굳이 어려운 말을 깨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불교 교리에 대해 과문하지만, 이를테면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나무불상을 태워 몸을 따뜻하게 하라.”함도 그 가르침이라고 들었다. 일상의 진실이 그렇게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는 뜻이겠다.


한용진 형은 제주에서 ‘벽돌 갈아 거울 만들기’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반평생을 외국에서 떠돌다 수구초심으로 이 땅을 찾아서, 그것도 이 나라의 가장 먼 변방에서, 더구나 “돌 같지 않은(?)” 돌을 갖고도 조형의 한 진경(眞景)을 보여주었다. 뿌리 땅에 돌아온 그의 만년 작업이 이 보다 더 진실 되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김형국(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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