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남당알은 큰물성창과 남당포의 경계..신촌리 큰물성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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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남당알은 큰물성창과 남당포의 경계..신촌리 큰물성창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12.15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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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리의 선민들은 일찍이 장사를 위해 물길을 텄다고 한다.

신촌리 큰물성창
 

•위치 ; 조천읍 신촌리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유형 ; 포구

 

 

 

신촌리는 크게 동카름과 서카름으로 나뉜다. 그 안에 다시 작은 마을들이 있는데 동카름에는 東洞, 中洞, 大水洞, 中上洞, 碧水동이 속하고, 서카름에는 西下洞, 西元洞, 西上洞, 瀛牧洞, 동수동이 속한다.


신촌포구는 외항과 내항으로 구분된다. 내항은 옛큰물성창이다. 큰물성창은 신촌리 대수동에 있다. 포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포구 안쪽에 자리잡은 용천수 ‘큰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명칭이다. 큰물은 이 마을의 상징이자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큰물성창은 신촌리 대수동 새똥코지와 는새여 사이 후미진 곳에 있다. 는새여와 남당알이 하늬바람을, 그리고 새똥코지가 높새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 준다. 포구는 조간대(潮間帶) 중층에 걸쳐 있다. 썰물에는 포구가 말라버려 배가 드나들 수 없다. 따라서 포구 바깥에 있는 바랑알과 이선달원 주변을 보조 포구로 삼았다.


포구 동쪽에 자리잡은 ‘바랑알’과 이 일대의 크고작은 여들이 방파제를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방파제를 축조했다. 그러나 편의를 좇다 보니 수심을 고려하지 않아 수심이 깊은 곳은 막고 낮은 곳으로 물길을 열어 놓았다는 불만이 있다. 그리고 샛바람에는 의지가 되지만 갈바람, 하늬바람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뭍에서 멀리 뻗어나간 방파제는 시멘트 콘크리트와 테트라포트로 조성되었지만 성창에서 큰물 가까운 안쪽에는 옛날 인력으로 쌓은 성창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남당알은 큰물성창과 남당포의 경계가 된다. 남당포는 인근에 당(堂)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남당 바로 앞으로 길이 개설되고 있어서 당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남당포는 전에는 큰물성창까지 포함해 이 일대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어찌 보면 큰물성창의 다른 이름 혹은 옛이름으로도 보인다.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 신촌포는 소흘포(所訖浦)와 조천포(朝天浦)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또, “漁人乘潮滿回泊小艇 非他國人所可容易泊舡處(어인(漁人)들은 밀물을 타고와 소정(小艇)을 붙이나, 타국 사람들은 쉽사리 배를 붙일 곳이 못 된다)”고 하였다.


신촌리의 선민들은 일찍이 장사를 위해 물길을 텄다고 한다. 耽羅古誌를 훑어보면 조선조 중엽부터 남당포에서 진남포, 청진, 원산까지 풍선(風船)을 타고 나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른바 군대환(君大丸), 순길환(順吉丸), 경성환(京城丸) 등의 기선의 위세에 눌려 이들 범선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작성 110114, 보완 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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