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마을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북촌리 포구(뒷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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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을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북촌리 포구(뒷개)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12.21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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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는 北을 뜻하는 퉁구스 말로서 옛날 우리 겨레가 쓰던 말이다.

북촌리 포구(뒷개)

위치 ; 조천읍 북촌리
시대 ; 미상(고려시대말 추정)
유형 ; 어로시설(포구)

북촌리_포구_옛모습
북촌리_포구

 

뒷개는 마을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뒤’는 北을 뜻하는 퉁구스 말로서 옛날 우리 겨레가 쓰던 말이다. 뒷개의 축조 시기는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고려시대말로 추정하고 있다.

『耽羅星主遺事』에 따르면 ‘뒷개’ 동편 ‘창곰알’ 지경에 자리잡은 환해장성은 고려 원종 무렵에 쌓아진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검석개’에 얽힌 이야기 중에는 목선을 타고 온 ‘뙤놈’과 싸웠던 곳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같은 추론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뙤놈’은 중국인이 아닌 몽고군을 지칭하고 있다.


‘뒷개’의 중심축은 당밭에서 당집을 거쳐 북촌휴게소에 이르는 지역이다. 동편으로는 돈지코지가 된다. 두 개의 안캐(동안캐, 서안캐)와 중캐, 밖캐로 구분되어 있다. 서안캐와 중캐 사이에는 해상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이 밑으로는 3톤 이하의 어선들만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북촌 지역은 4․3 당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뒷개 주변도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사람들의 발길도 끊겼었다.

홍순식씨의 증언에 의하면 소개령으로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게 되자 자연의 위세 앞에 중캐 선착장 일부도 무너져 어민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동선착장보다 서선착장이 더욱 심했다. 1950년대부터 어촌진흥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복구공사를 벌여 원상을 회복시켰으나 당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방파제공사는 1984년부터 시작됐다. 1984~1989년에 서방파제와 선착장이 만들어졌다. 동방파제는 1988년 축조됐다. 이들 방파제공사는 모건설업체의 지원을 받아 자체에서 시공했다. 제주항 방파제공사를 맡고 있는 업체가 북촌 해안의 돌을 사용하는 대신 그 대가로 만들어 준 것이다.

홍순식씨는 예로부터 이 일대의 돌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단단하면서 무거워 방파제공사용으로는 안성마춤이라고 한다. 그러나 방파제가 낮게 만들어져 야간 밀물 때면 배 댈 곳을 찾기 어려워 곤욕을 치른다고 한다.


뒷개 주변에는 간잘미, 검둥이, 고라진, 고망핀, 물씨둔목, 밋방신, 방애, 남개, 너벙, 높은, 대방, 동개머리, 말뚝박은, 모르기, 밭조강, 벌어진, 복냉이, 볼락, 산끗, 새배, 샛마르, 새개머리, 설픈, 성근, 수덕이, 숨은, 안조강, 엉남마르, 오시, 우돌왓동산, 작은새비, 주름촐리, 진둔목, 탄너벙, 탄밋방신, 펜난, 펭풍, 해, 활대모살 등등의 여가 있다.


더군다나 밖캐 한복판에는 800㎥ 규모의 수중암초가 자리잡고 있어 어선입출항에 큰 지장을 준다. 1988~1989년에 연이어 수중발파작업을 벌였으나 극히 일부만 깨졌을 뿐이다. 포구 남서쪽에 도대불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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