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오현음악부와 길버트음악관..그리고 인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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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오현음악부와 길버트음악관..그리고 인간애
  • 고현준
  • 승인 2021.10.29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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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장의 빛 바랜 사진에 길버트 소령의 인류애와 제주도민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길버트 소령이 제주를 떠나면서 오현음악부 연주를 배위에서 지휘하는 모습

 

오현음악부(교악대)는 6,25전쟁이 끝난 후 폐허에서 제주도민에게 유일하게 음악이라는 즐거움을 주었던 학생밴드부였다.

60년대,70년대 보고, 즐길 거리가 아무 것도 없었던 제주에서 당시 오현음악부는 그 위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제주에서 악대로서는 유일했고 제주도의 거의 모든 행사장에 가장 앞장에 서서 그 모든 행사를 빛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제주에는 극장 외에 무슨 즐길 거리조차 없을 때라 오현교악대가 연주하는 우렁찬 행진소리가 들리면 제주시의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교악대의 행진을 바라보곤 했다.

한라문화제(지금은 탐라문화제)는 물론 전도체육대회 등 모든 행사의 시작은 오현밴드부의 행진이 가장 앞장을 서서 연주가 돼야 행사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래서 오현음악부는 제주도에서 주최하는 행사는 물론 도지사가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는 꼭 함께 했었던 제주도청의 전속 교향악단(?)이였고, 또한 경찰악대로서도 활동하며 경찰행사 때는 모자에 경찰마크를 달고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고봉식 선생이 남긴 역사적 유물

 

오현음악부는 당시 고봉식, 김승택, 박창표, 이상철 선생 등이 대를 이어 이끌며 학생들의 실력을 전국 대회에 나가서도 뒤지지 않는 능력을 배가시키는 노력들을 함께 했다.

그 결과가 매년 진주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관악부문 경연대회에서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서울에서 열린 제1회 KBS 관악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큰 결과를 일궈내기도 했다.

그렇게 음악으로 다져진 오현음악부 출신들은 직업도 다양하지만 세계를 아우르며 교향악단 등에서 활동하거나 도내 음악계에서도 중추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다.

그런 활동들이 기본이 되어 제주국제관악제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제주에 탄생시키기도 했던 배경이 됐던 것이다.

그런 제주음악의 현재를 있게 한 역사는 오현고에 세워졌던 ‘길버트음악관’이 그 시초가 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길버트음악관’은 제주화강암 돌로 만들어진 아담하고 전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예쁜 건물이었다.

오현고가 이전하기 전 500년은 넘었음 직한 큰 팽나무 2개가 있었던 중앙로 오현고 운동장 위 오현단 남서쪽에 그림처럼 서 있었던 그 건물은 길버트 소령이 시멘트 200포대를 지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김승택 선생님은 “학생 때였는데 직접 시멘트 포대를 날랐었다고 기억한다”고 전하고 있다.

고봉식 선생이 남긴 역사적 유물

 

제주도민이 어떻게 이런 은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제주국제관악제 사무국에서는 이상철 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클라리넷을 불렀던 소녀찾기 등 다양한 제주음악의 역사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결과가 우여곡절 끝에 길버트 소령 가족찾기로 이어졌고 그 가족을 제주에 초청하는 등 제주음악의 은인을 찾아 기억하고자 하는 뜻있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제주음악계가 함께 하는 그런 노력은 높이 평가돼야 마땅한 일이다.

최근 제주음악계는 길버트음악관이 있었던 자리에 길버트음악관 기념표지석을 세우는 사업을 진행중이다.

더욱이 역사적인 유물로 남아 있어야 할 길버트음악관이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길버트음악관 기념표지석은 제주도로서는 기념표지석 외에 더 큰 의미를 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6,25 전쟁후 폐허로 남은 피폐한 제주에 음악이라는 희망을 심어준 길버트 소령이 제주를 떠날 때의 모습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당시 오현고 음악부 학생들이 부두에 나와 환송연주를 하는데 떠나는 배 위에서 길버트 소령이 지휘를 하는 모습이 역사적인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우리는 전쟁이라는 현장에서의 인간적으로 또는 인류애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동적인 모든 장면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지금의 잣대로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저울질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역사적 유물이 된 고봉식 선생이 남긴 사진첩에는 길버트 소령에 대한 감사함은 물론 이별의 섭섭함과 그를 보내야 하는 애잔함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최후의 기념'이라는 부제를 작은 글씨로 적고 '노래는 국경을 넘어서'라는 큰 제목을 쓴  빛 바랜 사진 아래에는 "이별은 슬픈 것이었다. 우리를 낳아 준 우리를 길러 준 그는, 결국 갈리고 말었으니..쓰라린 순간이었다" (기록장에서}라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더해 길버트 소령이 배위에서 학생들의 연주를 지휘하는 사진 아래에 "주는 맘 받는 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음악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에는 아마 길버트 소령의  길버트 음악관에 대한 마지막 방문 때 지휘를 했던 듯 "우리에게 준 최후의 곡이었고 최후의 지휘였었다"(음악관에서)라는 내용이 담겨 있고,그가 오현음악부 학생들의 연주를 배위에서 지휘하는 모습과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배위에서)"라는 글을 써 놓아 그에 대한 감사함을 정말 짠하게 전하고 있다.

"그 어렵던 시절, 얼마나 고맙고 섭섭했으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고아가 아버지와 헤어지는 듯한  사실 눈믈 나는 광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길버트 소령은 희망과 꿈을 잃지 말라는 사랑을 주었고, 학생들은 그 마음을 잘 알았고, 고봉식 선생은  그가 준 음악이라는 선물로 그가 떠나는 길에 그의 음악으로 감사함을 전한 것이다.

비록 그 두 분(길버트 소령과 고봉식 선생)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들이 남긴 우정과 이 세상에 대한 흔적은 빛 바랜 사진과 글로 함께 남아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길버트음악관 기념표지석

 

길버트기념표지석 설치에 대해 처음에는 오현고등학교와 오현음악부총동문회가 주축이 돼 추진했지만 한 학교가 추진하는 사항을 지원해 줄 수 없다며 제주도청으로부터 기념표지석 설치를 거부당했다고 한다.

이후 제주국제관악제사무국은 물론 제주음악계가 모두 나서서 이를 추진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주도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꾸게 해 준 제주 음악의 은인을 기억하는 일을 어떻게 그런 단순 논리로 보는 것인지 이해난이다.

설사 오현고음악부 동문회가 추진한다 해도 6-70년대 제주도청 전속교향악단으로 활동했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면 제주도청은 당연히 그 의리를 지켜야 할 것이다.

길버트 소령과 제주도 고아원은 물론 당시 그가 각 학교에 만들었던 악대 창단과의 만남은 그의 숭고한 인류애에서 시작된 일이다.

전쟁영화로도 충분히 만들 가능성이 큰 그의 인류애적인 봉사는 제주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길버트음악관 기념표지석은 옛 터전 위에 세워질 계획이지만 사실 길버트음악괸은 다시 지어져 영원한 인류애의 사적지로 만들어져야 더 옳은 일이다.

제주도청은 길버트 소령의 제주도민을 위한 그 업적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길버트 소령의 딸 다이안 아놀드(Diane Arnold)여사

 

왼쪽부터 이경수 교장, 길버트 소령, 최승만 제주도지사, 김석호 오현 재단 이사

 

길버트 소령의 지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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