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가물개 고선생’.. 명당 해안동 고홍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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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가물개 고선생’.. 명당 해안동 고홍진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1.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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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의 허리와 같은 봉요형(蜂腰形)의 형국, 용호유정(龍虎有情)한 환포교쇄(環抱交鎖)의 명당지지(明堂之地

해안동 고홍진묘

 

위치 ; 제주시 해안동 35-43번지. 1100도로 도깨비도로 구간 우회하는 곳에서 축산단지 쪽으로 500여m 축산마을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900m 정도 올라간 곳 가족묘지들이 많이 있는 지역 동쪽에 있다.
유형 ; 묘
시대 ; 조선

해안동_고홍진묘

 


비문 앞 ; 通訓大夫行成均館典籍 高弘進之墓 配淑夫人光山金氏附後


비문 내용
公의 諱는 弘進이시고 字는 追而이시다. 始祖耽羅王高乙那의 77世孫이시고 中始祖 太子 諱末老의 33世孫이시다. 嘉善大夫諱貴男의 玄孫이시며 鄕貢進士諱定舜의 第3子이시다. 先祖35年(壬寅 西紀1602年)에 出生하셨다.


光海君10년(戊午 1618) 王大妃金氏(仁穆王后) 廢母論에 反對하다가 濟州에 流配된 正言 李瀷(號艮翁 大儒學者)이 8年 謫居中 濟州市 營後洞 書齋에서 鄕儒 子弟들을 모아 訓學할 때 公이 17세 少年으로 金晉鎔(明道蓭) 等과 入門하여 天賦의 聰明으로 程朱學을 修學하고 아울러 地理學을 探究하여 堪輿術에 能通하니 碩學이라고 稱하였다.


孝宗2年(辛卯 1651) 7月 牧使 李元鎭과 敎授 申纘이 到任한 後 鄕儒인 公을 자주 만나 交分을 親히 하였다. 牧使 李元鎭이 耽羅의 史的 書籍이 없음을 慨歎하여 公에게 耽羅志 編纂을 依賴하였다.


公이 高麗史와 各種 耽羅史記를 探究하여 歷史 地理 風俗 등을 網羅하여 體系的으로 詳細하고 正確하게 收錄하여 濟州를 昭詳히 把握할 수 있도록 2年餘의 辛苦 끝에 52歲時인 孝宗4年(癸巳 1653) 8月에 耽羅志를 出版하였는데 跋文은 敎授 申纘의 撰이다.(耽羅志木板本은 中央圖書館에 所藏中)


顯宗5年(甲辰 1664)에 別遣詩題御史 尹深의 詩(越裳氏獻白雉賦) 63세의 老齡으로 及第하였다. 詩題御史 尹深의 勸告로 2年 後인 丙午年에 成均館에서 施行하는 式年榜에 文科及第하여 初職 成均館典籍으로 後學養成에 數年間 盡力하다가 辭任 還鄕하였다.


顯宗8年(丁未 1667)에 耽羅世系錄을 編纂하여 歷代 耽羅星主를 直系先祖로 모셔온 都宗家의 宗系가 貴男公임을 밝혀냈다. 이것이 後日 濟州高氏 島陸合譜牒 發刊의 母體가 되고 高氏 各派譜의 根幹이 되게 하였다.


肅宗元年(乙卯 1675) 蘇斗山이 濟州牧使로 赴任 後 公과 交分이 두터웠다. 蘇 牧使는 公을 尊敬하여 道眼이라고 하였으며 民譚과 함께 耽羅四絶의 第一人이라고 稱하였다.


公이 3男1녀를 生하니 長曰 鄕大夫 尙佖이오 尙佖은 二男을 生하니 通政大夫 左承旨 璨 承政院左承旨 瓊(경)이다. 璨은 三男을 生하니 江原監司兼御史 萬春 通德郞 萬申과 萬己이다. 瓊은 三男을 生하니 奮(분)武原從一等功臣 高原郡守 萬甲 通德郞 萬丙과 萬戊(무)이다. 仲曰 留鄕座首 尙仡(흘)이요 尙仡은 三男을 生하니 嘉善大夫 瑗(원) 留鄕座首 瑚(호) 展力副尉 璜(황)이다.

瑗는 六男을 生하니 通政大夫 禮曹正郞 平海郡守 萬瞻 通政大夫 萬杓(표) 通德郞 萬範과 萬衡 萬齡(령) 萬增이다. 瑚는 一男을 生하니 留鄕座首 萬興이다. 璜은 二男을 生하니 展力副尉 萬彩(채)와 萬耆(기)이다. 季曰 留鄕座首 尙侃(간)이요 尙侃이 二男을 生하니 通政大夫 愛立 嘉善大夫 愛信이다. 愛立은 一男을 生하니 嘉善大夫 泰積이다. 愛信은 一男을 生하니 世彦이다.


壻(서)는 碧沙道察訪 吳峴이오 外孫은 進士 萬頃縣令 廷賓과 廷臣 廷寅(인)이다. 玄孫以下 內外孫이 繁昌하여 모두 登載하지 못하다. 이러한 靑氈(전)世代가 이어짐은 先代가 심은 陰德을 입음이 아니랴. 墓儀久弊하여 再修石物할 새 改刻竪碑하는 바이다.


濟州道文化財委員 金海人 金奉玉 謹撰 서기 2001년(辛巳) 3月 日 舊碑는 光復 前年 甲申春 云錫 始煥 基錫 詢謀同議하여 大圭 松協 觀德 處仁 處日 義捐竪碑하였다. 典籍公派門中會 會長 12世孫 龍憲 宗孫 13世孫 久雄 外 門中一同 謹竪 墓는 濟州市 海安洞 35-43番地 四所場三蜂道 午作(外未坐)이다.(단락은 필자가 편의상 나누었음)

고홍진은 비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濟州(耽羅)四絶의 한 사람이다. 탐라사절(耽羅四絶)이란 풍수지리에 밝은 고홍진(高弘進), 복서(卜筮)를 잘하여 장래를 예측, 적중시키는 일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문영후, 의술로 유명한 진국태(秦國泰), 풍채가 뛰어난 양유성(梁有成)을 말한다. 고홍진(高弘進)은 풍수에 도안(道眼)으로 유명하여 제주도 산야에 많은 구산(求山)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서는 고홍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조선 중기 제주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문신. 선조35년(1602)生, 숙종8년(1682)歿.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퇴이(退而). 일명 고봉래(高逢萊)라고 한다. 제주시 이호동 가물개마을에서 고정순(高定舜)의 3남으로 태어났다. 과거에 세 번이나 급제한 것으로 유명한 고만첨은 그의 증손이다.


광해군10년(1618)에 폐모론을 반대하여 제주에 귀양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명도암(明道菴) 김진용(金晋鎔)과 같이 글을 배웠으며, 효종 때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진(李元鎭)의 소개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현종5년(1664) 제주별견시재어사 윤심(尹深)이 내도하여 시취할 때에 65세의 나이로 응시, 제주 유생 문영후·문징후 형제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고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되었다.


1666년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배수(拜受)하고 귀향하였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탐라지(耽羅志)』를 편찬할 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제주시 이호동 가물개마을에 살면서 훈학을 하였는데, 흔히 ‘가물개 고선생’이라고 불렸다.


제주에 유배된 이익(李翊)[1629~1690]에게서 정주학(程朱學)을 익혔으며, 사학과 지리학에도 통달했다. 특히 풍수지리에 뛰어났다고 전한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집필자 김나영) 호가 退而라고 한 것은 비문과 다르다. 많은 인터넷 자료가 모두 退而라고 되어 있으나 비석에는 追而라고 되어 있다.

산담 안에 북쪽을 향해서 고홍진의 묘가 앞에 있고, 뒤에는 숙부인 광산김씨의 묘가 나란히 있다. 봉분의 크기는 보통보다 약간 큰 정도이며 부인의 묘가 좀 더 긴 봉분이다.

정면에 상여오름, 광이오름, 남조슨오름, 민오름이 보이고 멀리 사라봉과 별도봉, 더 멀리에 원당봉이 보이며, 오른쪽 가까이에 거문오름이 있다. 전체적으로 앞이 탁 트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비문 끝 부분에 午作(外未坐)라고 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未坐이나 실제로는(무덤 속에 관을 놓은 것은) 午作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필자는 풍수에 대해 전혀 모르므로 블로그 수암풍수지리연구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곤방(坤方)에서 간방(艮方)으로 行度하는 龍脈에서 감방(坎方)으로 分枝한 一條脈이 雌龍의 모습으로 미끄러지듯이 入首하는데, 현재 고홍진의 묘지가 있는 부분은 陰來陽受處로서 안정감이 있고, 左右龍虎砂의 균형이 조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현재 고홍진의 묘지가 있는 곳은 脈盡을 하지 못하고 큰 변화 없이 下處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아마도 正穴處는 고홍진의 묘소 밑으로 뻗어나간 脈의 盡處에 肉地를 형성하고 生氣聚結한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尋龍 후 點穴을 할 때에는 터의 陽明함과 左右均衡, 朝案山의 開面拱立, 水口의 關鎖, 玄武에서 生氣가 融結된 穴處까지의 來脈 과정, 左右龍虎砂의 吉凶, 得水 與否 등 수많은 것들을 충복해도 點穴하고자 하는 곳이 龍盡脈盡處인지를 看過해서는 안 된다.》(水馣풍수지리연구소 120706)


경암풍수지리연구회 카페의 글에는 고홍진의 묘역을 ‘벌의 허리와 같은 봉요형(蜂腰形)의 형국, 용호유정(龍虎有情)한 환포교쇄(環抱交鎖)의 명당지지(明堂之地)’라고 표현하였다.


《벌의 허리와 같은 봉요형(蜂腰形)의 지세이고 용호유정(龍虎有情)하고 수구(水口)가 빼어난 곳이다. 어승생의 맥을 받아 내룡(來龍)이 강하고 분명하며 고저기복(高低起伏)과 좌절우곡(左折右曲)의 용맥(龍脈)을 자랑하고 환포교쇄(環抱交鎖)하여 수세(水勢)가 당판을 중심으로 모이고 합수(合水)하여 양명한 기운이 모인 곳이며, 주변의 길사(吉砂)가 마치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도열(堵列)한 듯하고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 수려한 명당지지(明堂之地)이다.》(경암풍수지리연구회 120402)


좌측 뒤에는 모친 경주김씨묘가, 10m전방에 손자 璨의 묘가 있으며, 부친 高定舜묘는 과오름 안쪽에 있다고 하였다.(한국참풍수지리학회)

제주에는 고전적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 있다.


[개설]「김참봉과 고전적」에 등장하는 고전적은 조선 중기 현종 때 사람으로 풍수가로 유명한 인물인데, 제주시 명도암의 고씨들이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사무가 「고전적 본풀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참봉과 고전적」의 이야기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고전적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신이한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채록/수집상황]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원림리에 사는 홍태효(남, 83세)가 구연한 것으로, 1985년에 출판된 『제주도 전설지』에 실려 있다.


[내용]고전적이 제주시 가물개(지금의 삼양)라는 곳에서 살 때의 일이다.(필자 주 ; 가물개는 이호동에도 있다. 고홍진은 이호동 가물개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전적은 김참봉이 훈장으로 있는 서당에서 풍수지리를 공부하였는데, 다른 학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수지리에 능하였으나 서자 출신이라 하여 김참봉한테도 상놈과 같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한 번은 고전적이 김참봉에게 어떻게 하면 양반 신분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김참봉이, “어디 상놈이 양반 되는 일이 있느냐?”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김참봉이 죽어서 고전적이 묏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그때의 원수 갚음으로 험지를 장지로 정해 주었다.


어느 해, 김참봉의 수제자로 암행어사가 된 사람이 제주에 와서 김참봉의 묘를 찾았다. 그런데 암행어사가 가보니 김참봉이 풍로(風路)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암행어사가 고전적을 불러다놓고 어찌 된 일이냐고 따졌다.


고전적은 옛날 김참봉과의 일을 들먹이며 그때의 원한으로 그리 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어사가 고전적의 실력이 소문만큼 뛰어난 지 시험해 볼 요량으로 정혈 자리에 가서 앉으면서, 좋은 말로 고전적을 달래며 스승의 묏자리를 다시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고전적은 두말없이, 어사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면 정혈을 잡겠다고 하였다. 어사의 숨은 뜻을 단박에 알아챈 것이다. 그리하여 고전적의 실력을 인정한 어사가 전적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수담은 조상의 묘를 잘 써서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김참봉과 고전적」에서는 고전적이 자신을 무시한 김참봉의 묏자리를 험지로 잡아 복수하고, 이것을 알게 된 김참봉의 수제자가 고전적의 마음을 풀어 주면서 고전적의 능력을 높이 사 벼슬자리까지 내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풍수가로서 신이한 능력을 보인 고전적의 인간적 면모와 함께, 신분 상승을 갈망하던 당대 서민들의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또 하나의 민담
[개설]「고전적 부친 묘」에 등장하는 고전적은 조선 중기 현종 때 사람으로 풍수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제주시 명도암의 고씨들이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사무가 「고전적 본풀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전적 부친 묘」는 고전적이 부친의 묘자리를 잘 써서 서자라는 신분에도 전적 벼슬을 했다는 이야기로, 풍수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졌던 당대 서민들의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채록/수집상황]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사는 김병수(남, 82세)가 구연한 것으로, 1985년에 출판된 『제주도 전설지』에 실려 있다.


[내용]고전적은 서자 출신이었으나, 풍수를 익혀 보통 사람은 그 실력을 가히 짐작조차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아들들이 가매장인 토롱만 하여 두고 1년이 지나도록 묏자리를 마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고전적은 적자이자 맏형인 형님이 알아서 하겠거니 한 것이고, 형은 동생이 뛰어난 풍수가이니 마땅히 구산(求山)하리라고 여겨 서로 방심했던 것이다.


이에 기다리다 지친 형수가 고전적을 찾아와, 지리에 밝은 사람이 나서서 구산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하자, 고전적은 형님이 살아 있는데 형님이 먼저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대답했다.

이에 형수가 돌아가서 남편에게, 큰아들이 먼저 장사 지내는 일을 걱정하는 것이 도리라고 하면서, 동생에게 묏자리를 보도록 청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형님이 묏자리를 봐주도록 청하여 고전적이 좋은 묏자리를 골라 드디어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상두꾼들이 하관할 땅을 파는데 밑에서부터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고전적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면서, 입었던 상복을 벗어 한쪽 주머니를 떼고는 구멍에 슬며시 덮고 하관하도록 했다.

묏자리 형세가 옥녀하문형(玉女下門形)이기에 땅 속에서 물이 터진 것이 오히려 좋은 징조였던 것이다. 이렇게 장사를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전적은 서자 출신이었지만 전적 벼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고전적 부친 묘」는 묘자리를 잘 써서 발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옛 민담에서 적지 않게 등장하는 모티프의 하나이다.

물이 나오는 혈자리가 실은 옥녀하문형의 좋은 묘자리라는 반전이 서자인 주인공이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반전과 함께 드러나 이야기의 묘미를 살린다.
《작성 121215, 보완 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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