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마을 주민의 피와 땀으로 1963년 6월 완공..오조리 양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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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을 주민의 피와 땀으로 1963년 6월 완공..오조리 양어장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0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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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소유 등기 소홀히 해 오조리 소유가 아니라 국가소유.. 50년동안 한국자산관리공사 자산

오조리 양어장

 

위치 : 오조리 식산봉(바오름)에서 오조포구를 잇는 선에서 서쪽 내해(공유수면)
시대 ; 대한민국(1963)
유형 ; 어로시설

오조리_내수면둑방
오조리_양어장둑

 


오조리 양어장은 1961년 7월에 오조리 청년․부녀회가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자조, 자립, 협동을 내건 잘 살기 운동 깃발 아래 마을 공동 소득을 위한 개발사업으로 정부에 건의, 채택되어 1962년 10월에 착공하였다.

지원금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박정희) 하사금 20만원과 농어촌진흥자금 30만원(무이자 2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합계 50만원과 마을 주민의 피와 땀으로 1963년 6월에 완공하였다. 제주일보(141020)에 따르면 착공시기가 1963년이고 1964년 보리흉작으로 춘궁기가 닥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6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마을주민 연인원 2,500명이 식산봉의 흙과 돌을 날라다 석축을 쌓고 성토를 하여 제방을 만드는 노력봉사를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발등을 찍히거나 허리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둑 길이 182미터, 높이 4.5미터, 너비 4미터, 수문 2개소에 면적은 26만제곱미터(약 8만평)이다.


주어종으로는 뱀장어, 숭어, 우럭이 있다. 지금도 밀물 때 수문을 열었다가 썰물 때 닫는 옛 방식대로 숭어와 뱀장어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업적으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참숭어가 아닌 비린내가 심한 개숭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수익성이 없어서이다.(현장 ‘오조리 양어장’ 안내판, 제주일보 141020) 동쪽에는 오조리 포구가 있고 북쪽 식산봉에는 황근이 자생한다.

현대에 들어 만들어진 제주 최초의 양어장이다. 성산읍지(2006)가 밝힌 오조리 양어장 조성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62년 수산업에 종사하는 분이 많고 선박이 많아 현 양어장 내에 위치한 선착장 이설을 건의하였다. 총연장 92m, 903천원의 국고보조와 자체부담 281천원을 들여 동년 8월 23일에 착공 1963년 2월 10일 완공하였다.


선착장이 완공됨에 따라 1962년 3월 7일 재건국민운동 오조리청년회 계획으로 양어장 시설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양어장 계획을 상부에 건의한 바 당시 국가최고회의 의장(박정희)이 최고회의 이주일 부의장과 류달영 본부장 및 최고회의 위원이 오조리 현장을 답사하였다.


1963년 7월 2일 박정희 의장 하사금 200천원, 어촌진흥자금 300천원, 자체부담 1,300천원 계 1,800천원이 책정되었다.


1963년 9월 28일 양어장을 착공하여, 1964년 4월 30일 수문 1개소, 제방 172m를 축조하여 공정의 70%를 완공했으나 그 해 흉작으로 자체부담금 과다로 완공을 못하였다.


1965년 10월 20일 자체자금 100천원과 재부친목회 지원금 100천원 계 200천원으로 1966년 4월 7일 미비된 수문보완공사를 착공하여 1966년 5월 10일 준공하였다.


1966년 5월 11일 이후 자체자금 300천원을 마련 제방석축 및 성토매립을 동년 8월 15일 착공, 동년 9월 17일 완공하였다.


1966년말 간보의 필요성을 상부기관에 사업계획서를 제출 1967년 자조근로사업으로 확정, 미공법 480-2 사업으로 양곡 30톤과 자재대 현금 220천원을 보조받아 300m의 강보를 1967년 6월 15일 착공, 동년 10월 9일에 완공하였다.


1968년 1월 19일 정우식 도지사의 초도순시 때 양어장에 대한 미비점을 건의한 바 동년 상반기 사업으로 양곡 35톤, 현금 220천원을 지원받아 동년 3월 25일 미비된 부분을 착공, 1968년 6월 15일에 약 5년간의 각고 끝에 완공하였다.


그래도 현대식 양식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여 운영에 어려움이 많던 중 1979년 강창수 남제주군수의 부임 초도순시 때 건의하여 보조금 10,000천원, 자체부담 2,500천원 총계 12,500천원과 주민노력동원 470명, 1980년 9월 17일 착공, 축양장 50㎡, 제방보수 93.5m, 수문보수 7개소, 관리사 보수 1동(44.4㎡), 간보 보강 167.6m, 호안 축조 100m를 동년 12월 30일에 완공하여 양어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98년 2월 26일 펌프실 1동, 해수인수시설 100m, 간보석축보수, 무동력선(0.7톤)을 마련하는 데 국비 75,000천원, 도비 67,500천원, 자체자금 9,840천원, 총계 152,340천원을 투입하여 1998년 8월 24일 준공하였다.


양어장 면적은 약 30만㎡(10만평)으로 현재 오조리마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다.(2006년 성산읍지)
숭어와 우럭, 자연산 뱀장어를 키운다는 곳이다. 당시 마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다치는 사람이 속출하면서 이룩한 양어장이다.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자립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마을공동체의 자산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일심 단결하여 동원 인원 대비 엄청난 규모의 양어장을 조성한 신화적 장소다.(한라일보 140916)


둑 길이 182m, 높이 4.5m, 수문 2개소를 갖춘 26만㎡ 규모의 양식장은 착공 4년 후인 1967년 완공됐다. 식산봉의 흙과 돌을 날라 석축을 쌓고 성토를 하는 제방공사에는 연인원 2500여 명이 동원됐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양어장이 건설됐다. 맨손으로 해안가에 산재한 무거운 돌을 꺼내 외벽을 쌓던 중 발을 찧거나 허리를 다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돌담을 쌓는 방식으로 둑과 석축을 만들어 조성한 양식장은 47년이 지났지만 옛 방식대로 자연산 숭어와 뱀장어를 키우고 있다.

바다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숭어의 습성에 맞춰 물이 들어올 때는 수문을 열었다가 썰물 때는 수문을 닫아 고기를 가둔다. 소득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양어장 소득이 짭짤하지가 않다. 겨울철 별미로 꼽히는 참숭어가 아닌 비린내가 나서 날로는 먹지 못하는 개숭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다.(제주신보 141019)


이렇게 마을 주민들의 피땀이 배어 있는 양어장을 마을 소유로 등기 또는 법인화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행정적으로 오조리 소유가 아니라 국가소유가 되어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자산관리공사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양어장 안쪽에서는 수전물, 주군디물, 족지물 등 용천수가 솟아난다. 오조리 양어장 일대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겨울철이면 천연기념물인 황새, 고니, 물수리,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흑기러기, 원앙 등 의귀한 종들을 비롯하여 가마우지류, 백로류, 물닭류, 섭금류 및 갈매기류 등이 물가를 찾아와 겨울을 보낸다.
《작성 130811, 보완 141020, 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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