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호종단이 돌아감을 막았다..고산1리 차귀도(죽도)
상태바
[향토문화] 호종단이 돌아감을 막았다..고산1리 차귀도(죽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5.08 0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1970년대말까지만 해도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

고산1리 차귀도(죽도)

 

천연기념물 422호(2000년 7월 18일 지정)
위치 : 한경면 고산리 산34, 81번지 등(동경 126° 9′ 00″, 북위 33° 18′ 30″)

고산1리_차귀도지시리(독수리)
고산1리_차귀섬

 

차귀도(遮歸島)는 고산 해안으로부터 1㎞ 떨어져 있는 무인도로 제주도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섬이다. 섬의 전체 모양은 동서로 길쭉한 모양을 이루고 있고, 동쪽과 서쪽에 봉우리가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면이 석벽으로 형성되어 있고, 섬 중앙은 평지이다.

차귀도 주변에는 지실이섬, 누운섬 등 무인도가 분포하고 있다. 동서 길이 920m, 남북 길이 430m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면적은 155,861㎡이다.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고봉의 표고는 61m이다.

차귀도는 주로 응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고산 해안에 위치하는 수월봉과 같이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하이드로볼케이노(hydrovolcano)이다.

하이드로볼케이노는 분화 시 마그마가 외부의 물과 접촉하여 강력한 폭발을 일으킴으로써 만들어지는 화산체이다. 분화의 중심은 섬 남쪽에 위치하는 장군바위 근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차귀도는 두 개의 수성화산이 섬의 동부와 서부에 연달아 만들어지며 특이하게 만들어진 화산복합체이다.

응회암이 분포하는 섬 동쪽의 해식애로 이루어진 암석해안이 잘 발달하며, 그 단애면에는 해식동굴과 벌집구조의 타포니가 출현한다. 그러나 섬 서쪽에는 스코리아(scoria)를 비롯하여 스패터(spatter)와 용암류가 분포하여 구성 물질에 차이를 보인다. 섬의 만입부에는 자갈해안이 발달하며 사빈은 나타나지 않지만 다양한 해안 경관을 보인다.

타포니(tafoni)란 비교적 건조한 지방의 암석 절벽이나 해안에서 잘 형성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형태가 마치 벌집모양이라고 하여 지질학에서는 벌집구조(honeycomb structure)라고 부른다. 해안 지역에서 타포니는 주로 염분이 암석의 입자 사이에 들어가 풍화가 진행되면서 시작된다. 풍화가 진행되어 어떤 부분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되면 그 곳을 중심으로 풍화가 심화된다.

섬의 대부분은 띠나 억새가 우점하는 초지대이고, 부분적으로 곰솔 조림지가 있다. 차귀도에서 자라는 식물은 모두 82종류이며 나무는 13종류, 양치식물은 도깨비고비 1종류, 68종은 초분류인데 특이한 종으로 해녀콩이 있다. 텃새로는 바다직박구리, 흑조 등이 벼랑의 바위틈에 둥지를 만들어 서식하고 있고, 철새로는 도요류와 오리류 등이 찾아온다.

차귀도는 제주도에서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지역으로,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이 매우 다양하며 아열대성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5∼10m 수심에는 수 많은 홍조식물이 자라고 있다.

홍조식물 중 아직 공식적으로 학계에 발표되지 않은 기는비단잘록이를 비롯한 Tiffaniella Chejuensis, Callithamniella Koreana, Amphiroa Chejuensis 등의 식물과 어깃꼴거미줄, 나도참빗살잎, 각시헛오디풀 등의 한국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종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아열대지역에 서식하는 홍조류의 여러 종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어 해조류의 분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동물의 경우 해면동물 13종 중 3종이 한국 미기록종이고, 극피동물은 6종 중 1종·자포동물은 총 15종 중에 산호충류 2종·대형동물은 8종 중 1종·이매패류는 12종 중 9종·갑각류는 17종 중 4종이 한국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종이다. 육상생물로는 곰솔·제주조릿대·순비기나무·사철나무·멍석딸기·억새·닭의장풀·쇠고비 등이 있으나 매우 빈약하다.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기록되지 않은 종들 내지 신종 해산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생물학적인 가치가 높은 곳이다.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미기록종과 신종 출현의 가능성이 큰 곳이며, 해산·동·식물 분포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주변 바다는 수심이 깊고 참돔·돌돔·혹돔·벤자리·자바리 등 어족이 풍부하여 1월~3월, 6월~12월에 낚시꾼이 몰린다.

차귀도는 흔히 대섬(竹島), 누운섬(臥島), 지시리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나 사실은 썩은섬(썩은여=형제섬), 상여섬(화단섬), 생이섬(새섬) 등 작은 섬들과 장군여, 간출암(干出岩) 등의 여(礖=작은 암초)로 이루어져 있는데, 죽도가 본섬이고 나머지는 부속섬이라 할 수 있다.

누운섬(눈섬)은 동경 126°, 북위 33° 19′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면적은 5,058㎡이다. 자구내 포구에서는 약 300m 지점에 있다. 섬의 형태는 분화구 북쪽의 외륜이 침식되어 전체적으로는 Y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섬의 중앙부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

눈섬에 자라는 뿌리식물은 해변에 특징적으로 4종이 있고, 초본식물은 36종이 자라고 있다. 텃새로는 바다직박구리가 벼랑 바위틈에 둥지를 만들어 서식하고 있으며 철새로는 도요류와 오리류가 찾아온다.

지실이섬의 위치는 동경 126° 10′, 북위 33° 19′로 차귀도 남방에 위치해 있고 눈섬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지실이섬에는 고산리를 마주하는 동쪽 지점에 수중 동굴입구 좌우 두 곳이 있다.

상여섬(화단섬)은 지실이섬과 생이섬 사이에 네모꼴 모양인 섬으로, 면적은 지실이섬 절반 정도 되는 작은 섬이다.

생이섬(새섬)은 지실이섬, 상여섬과 섬으로 연이어 있는 자그마한 섬으로 면적은 상여섬보다 작다.
썩은섬(형제섬)은 차귀섬과 생이섬 사이에 뾰족하게 형제처럼 두 봉우리가 나란히 위치해 있는 섬으로 면적은 지실이섬보다 작으며 화산암과 화산토로 이루어져 있다.

차귀도라는 지명은 호종단이라는 중국의 풍수지리사 전설과 관련해서 생겨났다. 고려 16대 예종 임금 때였다. 중국에서는 앞으로 제주도에서 유능한 인재가 나오리라는 관측이 떠돌았다.

이를 질투한 중국의 조정에서는 압승지술에 능한 호종단(胡宗旦은 예종 때 고려에 귀화하여 벼슬을 지내기도 한 실존인물이지만 제주도에서는 고종달이라고 전승됨)을 불러, 제주도에 유능한 인재가 나면 안 될 터인즉, 제주도에 있은 13혈(穴)을 찾아 모두 막으라는 명을 내렸다.

명을 받고 호종단을 제주에 왔다. 그리고 남원에 있는 감목 김씨를 비서로 채용하였다. 그가 맨 처음 침질을 한 곳은 표선면 옥기에 있는 혈이었다. 그 침은 감목 김씨에게 지키게 하고 다음 혈을 찾아 떠났다. 호종단이 떠나고 난 후 돌연히 침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김씨는 슬그머니 침을 반쯤은 빼어버렸다. 이윽고 돌아온 호종단은 김씨에게 그 곳에 집을 짓고 살 것을 권유하였다. 김씨는 그곳에 서 있던 나무를 휘어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혈에 침질을 하지 않은 호종단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 후 호종단은 서귀읍 서홍리로 혈을 뜨러 갔다. 호종단이 서홍리에 닿기 전이었다. 물귀신인 백발노인이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와 점심 그릇인 행기에 물을 가득 담고서는 소 길마 속에 감추면서, 이렇게 부탁하였다.

“누가 와서 이 물을 찾더라도 모른다고 하시오.”

얼마 후에 웬 사람이 와서 이 근처에 '꼬부랑낭 아래 행기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왔다. 농부도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모른다고 하고 잡아떼었다. 호종단은 그 근처를 한참이나 헤매었다. 그러나 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종단은 자기의 술서를 즉석에서 찢어버리고 그곳을 떠났다.

사실은 꼬부랑낭은 쇠질메(소 길마)를 뜻는 것이고 행기물은 놋그릇에 담긴 물이므로 술서가 정확했는데 호종단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호종단이 그때 혈을 뜨지 못하였으므로 지금도 서홍리에서는 지장샘물이 생생하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토산1리 ᄂᆞ단새미, 화북1동 행기물에도 똑 같은 내용의 전설이 전해옴)

호종단이 귀국하려고 한경면 고산 앞바다에 있는 차귀섬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 마리의 날쌘 매가 날아와 별안간 폭풍으로 변하여 배를 침몰시켰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한라산 수호신이 매로 화하여 호종단의 횡포에 복수한 것이라고 한다.

고려조정에서는 그 신기함을 보고받은 즉시 광양왕이라는 작위를 수여하고 한라산 호국신사라 하여 매년 향과 폐백을 내려 제사지내게 했다고 『동국여지승람』이나 『탐라지』 등 옛 문헌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훗사람들은 호종단이 돌아감을 막았다 하여, 이 섬을 차귀섬 (전에는 竹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죽도(竹島)=대정현 서쪽 26리에 있다. 사면이 모두 돌벽이다.

동남쪽에 배를 대는 데가 있는데, 왜구가 여러 번 이곳으로 들어왔다.〉(탐라지, 조선강역총도) 탐라도, 탐라순력도(한라장촉), 영주산대총도, 대동여지도, 제주삼읍전도에 모두 죽도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에는 전체를 '차귀도'라 하고 죽도, 와도 등의 세부 섬도 표시했다. 조선시대까지는 '죽도'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차귀도로 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차귀도가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1970년대말까지만 해도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 기록에는 1911년 좌씨가 처음 입도했고 이후 1977년까지 2~8가구가 보리, 콩, 수박, 참외 등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고치규씨는 한때 차귀섬이 50% 정도를 소유하면서 이 땅에 무를 재배하면서 육군 제1훈련소가 모슬포에 있을 때(1951∼1956년) 군용 부식 재료로 군납을 하기도 했고 훈련소가 이전해 간 다음에는 축산업을 하기도 했다.(高山里새동네鄕土錄) 1978년부터 무인도로 분류되고 있다. 1974년 추자도 간첩사건 이후 강제로 이주당한 것이다.

차귀도는 2000년 7월 18일 천연기념물 제422호(遮歸島天然保護區域)로 지정됐다. 1965년부터 국내 대기업의 소유였던 것을 2012년 문화재청이 사들여 그 때부터 일반인에게 공개하면서 탐방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고산초등학교 편, 한국지명유래집, 다음백과사전 대한민국 구석구석, 다음백과사전 무인도서, 향토문화전자대전, 두산백과, 경향신문150304, 한라일보150903, 연합뉴스160706

《작성 16070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