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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고영철의 향토연구"제주의 원류를 찾아서.."
[향토문화]천연요새..상귀리 항바드리토성김통정이 한라산 북쪽 귀일촌(貴日村)에 외성은 토성, 내성은 돌로 성 쌓아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http://www.jejuhistory.co.kr/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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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11.15  00: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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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귀리 항바드리토성


항바드리 토성 土城
문화재 지정사항 ;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28호
위치 ; 애월읍 상귀리
시대 ; 고려 시대
유형 ; 방어유적(토성)

 
   
 

   
 

고려 때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고 있던 때가 있었는데 최충헌이 오랜 기간을 집권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야간 경비를 하던 부대로 '야별초'가 있었다. 야별초는 후에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고종18년(서기1231)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고려군이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오자 이들을 별도로 모아 '신의군'이라고 하였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불렀다. 삼별초는 그 당시 특수정예군이었으며 국내치안유지, 친위대, 몽고군과의 싸움에 있어서 전위대 역할을 하였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고종19년(1232)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긴 항쟁을 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삼별초 군인들이 불복하여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고 고려와 몽고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였다.

원종11년(1270) 삼별초는 천여척의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진도로 가서 용장성을 쌓고 항전하였으나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흔도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배중손 장군과 승화후 부자는 전사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진도 공격에 앞서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전한 후 탐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원종11년(1270) 9월에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에게 방위군 200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했다.

이어 장군 고여림(高汝霖)에게도 군대를 주어 탐라 수비에 가담하도록 했다. 그들은 탐라 수비를 위해 도민을 동원하여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진도의 삼별초도 관군이 탐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이문경(李文京)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문경은 관군을 송담천(松淡川)으로 유인하여 복병술로 반격하니 고여림은 불의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문경은 명월포에서 조천포(朝天浦)까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탐라를 지배했다.


원종12년(1271) 5월 15일에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니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진도를 탈출한 사병을 거느리고 앞서 이문경 별장이 장악한 탐라에 들어와서 후일의 재기를 다짐했다. 이 때 남해안에 있던 별장 유존혁(劉存奕)도 병선 80척을 끌고 와서 합세했다.


김통정이 한라산 북쪽 귀일촌(貴日村)에 외성은 토성을 쌓고 내성은 돌로 성을 쌓으니 이것이 항바드리성이다.('항파두리'라는 말은 이 고장 지명 '항바드리'를 한자말로 옮겨적은 것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항바드리 윗 지경을 '장태코'라고 부르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흐를 때면 지형이 마치 장태코에서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그 아래 지경은 장태코에서 내리는 물을 받는 큰 물항아리처럼 생겼다 해서 이런 지명이 붙여졌다.)

이외에 애월포에는 목성(木城)을 쌓고 하귀포를 군항(軍港)으로 삼았다. 지금 동귀리를 군항동(군냉이)이라 함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고적조는 항바드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古土城 ; 在州西南三十六里 周十五里 三別抄所築
󰋮缸波頭古城 ; 在州西四十里城中有泉 大旱不渴 ‥‥ 金通精 率三別抄來據貴日村缸波頭里 築此城 以拒之 (金)方慶等 進攻拔之‥‥


이와 같이 ‘고토성’과 ‘항파두고성’이 나오는데, 일부 학자들은 ‘고토성’은 외성, 항파두고성은 수뇌부의 중요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내성으로 보고 있기는 하나 거리상 4리(1600m)의 차이가 있어 수긍하기 힘들다.


망명정부의 도성(都城)이었던 항파두리 성의 규모를 보면 외성인 토성은 둘레가 3.8㎞이며 성내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역시 토성인 한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성은 돌과 흙으로 정교하고 단단하게 축조되고 고급 막새기와를 사용하는 등 강화도·진도 성의 축조기법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외성의 축조는 기저부의 기단석렬 내부에 전체적으로 부석(敷石=집터 또는 무덤의 바닥이나 둘레에 한두 겹 얇게 깐 돌)을 까는 방법을 썼다. 성의 내·외곽으로 기단석렬을 깔았다.


외성의 둘레는 약 4km, 토성 내의 면적은 약 27만평에 달했으며, 쌓은 방법은 흙-자갈-흙-자갈을 번갈아 수십층을 쌓았다.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외성인 토성은 둘레가 15리이며 성내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석축을 한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토성의 면적은 약 27만평에 달했으며,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고, 내성은 둘레 약 1Km의 石城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성 안에는 대궐·관아·막사·병영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향사·옥사·사찰·군기고·곡창·훈련장·후망소·요지·우물·못(址) 등이 토성 안팎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북제주군지. 141쪽)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缸波頭古城'이 내성이라면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샘(구시물)은 토성 밖에 있으니 현존하는 토성이 내성이었는지 외성이었는지를 구별하기는 어렵다.


이 곳은 지대가 높고 동서로 하천이 있어서 천연적 요새를 이룬다. 또 성밑에 있는 샘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식수의 확보가 용이하였으므로 이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토성이 완성된 후에는 민가에서 재(木灰)를 거두어 성 위에 살포하였다가 적의 침공이 있을 때에는 말을 그 위로 달리게 했는데 말 꼬리에 대빗자루를 달았으므로 재먼지가 충천하여 연막을 편 것처럼 성의 모습이 감추어졌다고 전한다.(전술적으로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김통정은 탐라에 들어와서 항바드리성을 축조하는 한편, 진용을 정비하여 본토 공격에 나섰다.

그들의 공격 목표는 첫째 몽고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건조하는 병선을 파괴할 것, 둘째 송경(松京)으로 수송하는 공미와 그 수송 선박을 탈취할 것, 셋째 몽고인과 몽고에 협조하는 관원 및 조선공(造船工)을 납치할 것 등이었다.


원나라 왕은 원종13년(1272) 12월에 탐라 공략을 위한 동원령을 내리고, 군사 6000과 뱃사공 3000명을 동원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군 김백균(金伯鈞)을 경상도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 판합문사 이신손(李信孫)을 충청도 방호사로 임명하여 해상 경비를 엄하게 하면서 탐라 공략의 시기를 원종14년(1273) 3월로 정하여 진행하였다.


원종14년 2월에 홍다구는 원에서 돌아와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 . 마강(馬降) 및 고려 조정과 함께 탐라 공략을 의논하였다.

왕은 김방경(金方慶)에게 월(鉞 도끼, 왕명을 받은 지휘관의 상징)을 내려 정예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내려가게 하였다.


동년 3월말에 여몽 연합군은 고려군 6000, 몽고군 2000, 한군 2000 도합 1만명이 반남현(潘南縣..나주)에 집결하게 했다.

김방경은 4월 9일에 160척의 전선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여 삼별초의 요새가 한라산 서북 밑에 있다 하므로 정면 공격을 하면 희생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여 삼별초를 양단작전(兩斷作戰)으로 유인했다.

즉, 배 30척에 풀을 가득 실어 불을 켜고 전선으로 위장하여 명월포 앞바다로 진격하게 했다. 이를 본 삼별초는 여몽군이 명월포로 상륙하는 것으로 알고 김통정 이하 장수들이 명월포로 출진했다.


김방경은 스스로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4월 28일에 함덕포로 상륙했다. 이 곳을 수비하던 삼별초 이시화(李時和) 등은 죽기를 맹세하고 언덕 사이에 복병하여 싸웠다.

여몽군은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적진으로 돌진하고 장군 나유(羅裕)가 선봉대를 거느려 뒤따라 맹렬히 공격하니 중과부적으로 함덕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적전 상륙에 성공한 김방경은 서진을 재촉하여 파군봉(破軍峰) 전초(前硝)를 격파한 뒤 항바드리성을 공격했다. 한편, 명월포 앞바다로 나갔던 선단도 회항하여 귀일포로 상륙하여 김방경에 합세했다.


여몽 연합군은 맹렬한 화공(火攻)으로 항파두성을 공격하니 불화살은 성안 곳곳에 적중하여 불바다를 이루었다. 김원윤, 김윤서 장군 등이 필사적으로 방어하고자 했으나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여몽 연합군은 맹렬한 화공(火攻)으로 항파두리성을 공격하니 불화살은 성안 곳곳에 적중하여 불바다를 이루었다.

이 상황을 고려사 김방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左軍戰艦三十艘自飛揚島直擣賊壘 賊風靡走入子城. 官軍踰外城入 火矢四發 烟焰漲天 賊衆大亂 有自賊中來投者曰, 賊已勢窮謀遁可急擊之. 旣而賊酋金通精率其徒七十餘人遁入山中賊將李順恭曹時適等肉袒降. 方慶麾諸將入子城 士女號哭. 方慶曰 只誅巨魁耳 汝等勿懼 執其魁金允敘等六人斬于通街擒親黨三十五人分載降衆一千三百餘人而還. 其居民悉按堵如故於是忻都留蒙軍五百方慶亦使將軍宋甫演中郞將康社臣尹衡領京軍八百外別抄二百留鎭.〉


(좌군 전함 30소는 비양도로부터 바로 적진을 찌르니 적이 바람같이 쓰러져서 달아나 자성에 들어가는지라 관군이 외성을 넘어 들어가서 화시(火矢)를 사방으로 발하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차니 적의 무리가 크게 혼란하였다.

적중으로부터 와서 투항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적이 이미 형세가 궁하여 도망하기를 꾀하니 가히 급히 칠 것이라.”하였는데 조금 뒤에 적추(賊酋) 김통정(金通精)이 그 무리 70여 명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曺時適) 등은 상의를 벗고[肉袒] 항복하였다.

김방경이 제장(諸將)을 지휘하여 자성(子城)에 들어가매 사녀(士女)가 호곡(號哭)하거늘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괴수만 베어 죽일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고 그 괴수 김윤숙(金允叔) 등 6인을 잡아 거리에서 베고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고 항복한 무리 1,300여 명을 나누어 싣고 돌아오니 그 거민(居民)이 모두 이전과 같이 안도하였다.

이에 흔도는 몽고 군대 500명을 머무르게 하고 김방경도 역시 장군(將軍) 송보연(宋甫演), 중랑장(中郞將)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00명과 외별초(外別抄) 200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이에 의하면 항바드리성에 처음 진입한 것은 비양도로부터 출발한 좌군 병력이었으며, 외성을 넘어 들어가 내성을 공격하며 '화시사발(火矢四發)'을 쏘았다.

그 결과 삼별초군은 큰 혼란에 빠졌는데 여기서 사용한 火矢는 몽고군에 의한 화약무기의 사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제주 항전)


이 때, 김통정의 처 이화선(李華仙)은 남장을 하고 결사대 70명을 거느려 성을 탈출하여 명월포로 달아났다.

부인 이화선으로부터 항파두성 함락 소식을 들은 김통정은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피를 토하였다. 그는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산을 돌아 붉은오름(赤岳)에 진을 쳤다.


원종14년(1273) 5월 6일에 김통정은 출사제(出師祭)를 올리고 여몽군에 도전하니, 김방경은 송보연을 선봉장으로 총공격을 했다.

양군의 혈전으로 오름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용장 이문경, 김혁정 등도 분전하다 전사했다. 김통정은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분전했으나 기진맥진하여 산중으로 퇴각했고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이로써 삼별초는 고종18년(1231) 이래 42년간의 항몽혈투사(抗蒙血鬪史)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김봉옥, 제주통사)


현재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토성, 장수물, 구시물, 돌쩌귀 등이 있고, 대궐을 지었던 자리에는 '항몽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항몽순의비는 당시(1977)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쿠데타에 의한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총화단결을 다짐하는 국민교육도장으로 삼고자 성역화'하였다.

'삼별초는 쿠데타였지만 항몽,자주의 화신' = '박정희도 쿠데타지만 조국근대화의 영도자'라는 등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항몽순의비'의 전면 題字는 박정희의 글씨이며 후면 연혁은 이선근씨가 짓고 김충현씨가 썼다.(제주의 문화재 168쪽) 성역화 사업을 하기 전에는 밭담 주위에 깨어진 기왓장이 수없이 널려 있었는데 지금은 한 조각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이후 元은 탐라를 지배하기 위하여 官府(관부의 명칭 변화 ; 탐라국초토사→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군민안무사→고려환부→탐라총관부→군민만호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후 최영장군에 의하여 목호의 난(牧胡의 亂)이 평정되기까지 꼭 100년 동안 원은 탐라를 지배하였다.(제주도지, 744-7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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