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탐라왕 왕릉..화북2동 성주고봉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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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탐라왕 왕릉..화북2동 성주고봉례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5.2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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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때 군마를 여러 번 바치는 등 정성 다해

화북2동 성주고봉례묘

위치 ; 제주시 화북2동 4301번지. 거로마을 능동산

시대 ; 조선 초(1412년 추정)
유형 ; 옛무덤

▲ 화북2동_성주묘
▲ 거로마을_성주묘_발굴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로 들어가는 길목의 네거리를 곧 지나면 남쪽으로 황세왓 북쪽으로 거로마을로 갈라지는 좁은 네거리가 있다.

여기서 거로쪽으로 들어가면 거로교(巨老橋)가 있고 다리에 붙어서 오른쪽으로 비탈진 농로가 있는데 비탈길을 내려가면 바로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내창'(川)으로 난 왼쪽 길을 따라 100여m 가면 길이 끊기고 감귤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밭 안의 통로를 따라 100여m 되는 곳까지 가면 창고가 보이고 창고 북동쪽 동산에 성주묘(방형석축토광묘)가 있다.

2010년 현재 이 밭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다. 즉, 성주묘가 있는 밭은 맹지이다.


성주(星主)란 탐라왕국의 왕의 호칭이었다. 즉 성주묘는 탐라왕의 왕릉을 뜻하는 것이다.

거로마을 능동산의 성주묘의 주인공은 고봉례(高鳳禮)와 그의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알려지고 있다.


고봉례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우왕12년(1386) 탐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회유하기 위하여 제주에 파견된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대호군(大護軍) 진여의(陳如儀)가 임무를 마치고 우왕13년 4월 개경으로 갈 때 부친 고신걸(高臣傑)을 따라 개경에 갔다(김유정은 인질로 갔다고 하였음)가 「軍器少尹」으로 임명되었으며, 우왕14년(1388) 혹은 창왕즉위년(1389) 9월에 고려조정으로부터 「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된 사실이 있다.

부친 고신걸은 성주로서 당시 차현유가 난을 일으켜 안무사·목사·마축사 등을 살해하고 관사를 불태우고 우마를 宰食했을 때 진무 임엄, 천호 고덕우, 본토인 문신보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난을 소탕한 사람이다(제주도지 785∼787쪽)


고봉례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때에 군마를 여러 번 바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태종2년(1402) 탐라성주 재직 시에 신라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의 호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여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官),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官)으로 개칭되었다.

즉, 마지막 성주인데 그는 자신의 성주 직을 반납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태종7년(1407)에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태종10년(1410)에 제주안무사가 되었다. 태종11년(1411) 아들 고상온(高尙溫)에게 세직(世職)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官)을 승습시켜 줄 것을 청하여 승계시키고 한양에서 죽었다.

태종실록22권 태종11년 8월 27일 기사에 〈제주(濟州) 도주관(都州官) 좌도지(左都知)는 신의 집안이 대대로 맡는 세직(世職)이니, 장자(長子) 고상온(高尙溫)으로 대신하기를 빕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고 되어 있다.

태종은 고봉례가 죽자 종이 150권, 초 10정, 쌀과 콩 40섬, 목곽 등을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고봉례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조3년 7월 7일 갑진 〈제주도 사람 고봉례(高鳳禮) 등이 말 1백 필을 바치니, 쌀 1백 섬을 하사하였다.〉


※태종4년 4월 21일 신묘 〈제주(濟州) 토관(土官)의 칭호를 고쳐, 동도 천호소(東道千戶所)를 동도 정해진(東道靜海鎭)으로 하고, 서도 천호소(潟千戶所)를 서도 정해진(潟靜海鎭)으로 하고, 도천호(都千戶)를 도사수(都司守)로 하고, 상천호(上千戶)를 상사수(上司守)로 하고, 부천호(副千戶)를 부사수(副司守)로 하고, 도지관(道之官)을 도주관(都州官)으로 하고, 성주(星主)로 도주관 좌도지관(都州官左都知管)을 삼고, 왕자(王子)로 도주관 우도지관(都州官右都知管)을 삼았다.〉


※태종7년 5월 8일 신유 〈고봉례(高鳳禮)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삼았다.〉


※태종10년 5월 4일 경오 〈말[馬]을 종친(宗親)·대신(大臣)과 근신(近臣)에 나누어 주었다.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 고봉례(高鳳禮)와 경차관(敬差官) 조원(趙源)이 말 1백 필을 바쳤으므로, 이 하사(下賜)가 있은 것이다. 봉례(鳳禮)는 제주 성주(濟州星主)의 후손(後孫)이다.〉


※태종10년 5월 14일 경진 〈고봉례(高鳳禮)가 양마(良馬) 6필을 바치니, 명하여 예전 예(例)에 따라 쌀 1백 석을 주고, 제주(濟州) 사람으로 고봉례를 따라 서울에 온 자도 차등 있게 쌀을 주게 하였다.〉


※태종11년 3월 10일 경오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에게 쌀 20석을 내려 주었다.〉


※태종11년 5월 13일 계유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의 아내의 상사에 쌀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또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으며, 사람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게 하였다.〉


※태종11년 7월 6일 을축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에게 쌀·콩 30석을 내려 주었다.〉


※태종11년 8월 27일 병진 〈제주(濟州) 사람 고상온(高尙溫)이 세직(世職)을 승급하도록 명하였다.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상언하였다. "제주(濟州) 도주관(都州官) 좌도지(左都知)는 신의 세직(世職)이니, 장자(長子) 고상온(高尙溫)으로 대신하기를 빕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11년 11월 19일 병자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에게 쌀 20석을 내려 주었으니, 고봉례가 큰 구리 화로[銅鑪]를 바쳤기 때문이다.〉


※태종11년 11월 29일 병술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졸(卒)하였다. 고봉례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대언(代言)에게 명하였다.

"이 사람이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친척을 떠나 와서 벼슬하므로 내가 대단히 불쌍히 여겼는데, 지금 죽었으니 내가 몹시 슬프게 여긴다. 상장(喪葬)의 제구를 모두 부의하라." 양전(兩殿)이 모두 사제(賜祭)하고, 종이 1백 50권, 초[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


※태종12년 2월 11일 병인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고충언(高忠彦)으로 고봉례(高鳳禮)를 대신하여 제주(濟州) 도주관(都州官) 좌도지관(左都知管)을 삼았으니, 정부(政府)의 청을 따른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 〈본조 태종(太宗)2년 임오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와 왕자의 호가 너무 참람한 것 같다고 하여, 고치기를 청(請)하였으므로,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하였다.〉

탐라지, 증보탐라지, 고금사적 등에는 〈(제주)고을 東南 10리에 오랜 무덤 1구(丘)가 완연하다. 세간에 전해지기를 왕자묘라 한다.〉고 기록하였고, 고씨세보(高氏世譜)에는 〈좌도지관 고봉례의 묘가 화북 거로 지경에 부부합장묘로 안치되었다.〉라고 하였다.

묘의 구조는 가로 3m, 세로 4m 정도의 방묘(方墓)로, 2기가 90∼9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왼쪽 묘에는 두께 30cm, 가로 80∼100cm, 높이 70∼80cm 정도의 돌을 이용하여 벽을 세우고 그 속에 흙을 채웠었다.

판석석실형 고인돌을 연상케 하는 구조이다. 높이 70∼80cm 중에서 30∼40cm 정도는 땅 속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은 잘 다듬은 돌이 아니라 평평한 현무암 자연석을 사각형 모양의 직선이 되도록 일부 잘라내어 거친다듬한 것이다.

일부는 가로 세로 40∼50cm의 작은 돌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1997년 5월 5일 답사 당시 보니 발굴작업을 하다가 멈춘 상태인데 무덤 속에는 숯을 묻었던 것이 남아 있다.


오른쪽 묘에는 왼쪽 묘와 같은 큰 돌들을 사용하지 않고 직경 30∼40cm 정도의 자연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편평한 면을 바깥쪽으로 가게 하고 삐죽한 면을 안쪽으로 가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편평한 면을 이루어 왼쪽의 묘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는 숯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묘를 성주묘라고 추정하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① 마을 사람들이 이 묘가 있는 곳을 '능동산'이라고 부른다. 능(陵)은 왕의 무덤을 말한다.


② 고씨세보(高氏世譜)상의 고봉례의 묘 위치와 일치한다. 즉 고씨집안의 족보에 고봉례의 묘가 거로마을 능동산에 '남변임좌(南邊壬坐)되어 있다'고 한 것과 현재의 묘 위치와 일치한다.


③ 방묘(方墓)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된 묘제(墓制)인데 시기적으로 볼 때 고봉례의 생존 연대와 같다.


④ 일반인의 무덤에 비해 축조 방식이 다르고 크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축조 방법은 물론 경사진 지형을 일정한 높이로 쌓고 시신은 방형의 곽을 만들어 깊게 묻은 축조 방식은 분묘조성시에 다수의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⑤ 이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봉례 성주의 사망 연대와 비슷한 시기의 것이다. 즉, 출토된 흑상감청자·백사청자·백자대접편 등 10편의 출토유물들의 사용 연대가 조선초기 이전인 점을 감안한다면 묘의 조성 시기가 늦어도 조선초기로 볼 수 있으며, 이 또한 문헌이 전하는 고봉례 성주의 사망 연대인 태종11년(1411)과 일치한다.(열린제주시정소식 1997. 4. 24)


왕조실록 태종11년 5월 13일 기사에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의 아내의 상사에 쌀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또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으며, 사람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해 11월 29일 기사에는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졸(卒)하였다. 고봉례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대언(代言)에게 명하였다.


“이 사람이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친척을 떠나 와서 벼슬하므로 내가 대단히 불쌍히 여겼는데, 지금 죽었으니 내가 몹시 슬프게 여긴다. 상장(喪葬)의 제구를 모두 부의하라.”


양전(兩殿)이 모두 사제(賜祭)하고, 종이 1백 50권, 초[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부부가 같은 해(1411)에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조선 전기의 권력가들의 묘제는 외곽에 판석으로 방형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토광을 설치하여 목관을 안치하는 장법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현재는 봉분을 다시 쌓아 복원했다.


《작성 050518, 보완 140326, 170913》, 종이 1백 50권, 초[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부부가 같은 해(1411)에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조선 전기의 권력가들의 묘제는 외곽에 판석으로 방형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토광을 설치하여 목관을 안치하는 장법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현재는 봉분을 다시 쌓아 복원했다.
《작성 050518, 보완 140326》

위치 ; 제주시 화북2동 4301번지. 거로마을 능동산
시대 ; 조선 초(1412년 추정)
유형 ; 옛무덤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로 들어가는 길목의 네거리를 곧 지나면 남쪽으로 황세왓 북쪽으로 거로마을로 갈라지는 좁은 네거리가 있다.

여기서 거로쪽으로 들어가면 거로교(巨老橋)가 있고 다리에 붙어서 오른쪽으로 비탈진 농로가 있는데 비탈길을 내려가면 바로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내창'(川)으로 난 왼쪽 길을 따라 100여m 가면 길이 끊기고 감귤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밭 안의 통로를 따라 100여m 되는 곳까지 가면 창고가 보이고 창고 북동쪽 동산에 성주묘(방형석축토광묘)가 있다. 2010년 현재 이 밭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다. 즉, 성주묘가 있는 밭은 맹지이다.


성주(星主)란 탐라왕국의 왕의 호칭이었다. 즉 성주묘는 탐라왕의 왕릉을 뜻하는 것이다. 거로마을 능동산의 성주묘의 주인공은 고봉례(高鳳禮)와 그의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알려지고 있다.


고봉례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우왕12년(1386) 탐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회유하기 위하여 제주에 파견된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대호군(大護軍) 진여의(陳如儀)가 임무를 마치고 우왕13년 4월 개경으로 갈 때 부친 고신걸(高臣傑)을 따라 개경에 갔다(김유정은 인질로 갔다고 하였음)가 「軍器少尹」으로 임명되었으며, 우왕14년(1388) 혹은 창왕즉위년(1389) 9월에 고려조정으로부터 「濟州畜馬兼安撫別監」으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된 사실이 있다.

부친 고신걸은 성주로서 당시 차현유가 난을 일으켜 안무사·목사·마축사 등을 살해하고 관사를 불태우고 우마를 宰食했을 때 진무 임엄, 천호 고덕우, 본토인 문신보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난을 소탕한 사람이다(제주도지 785∼787쪽)


고봉례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때에 군마를 여러 번 바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태종2년(1402) 탐라성주 재직 시에 신라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의 호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여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官),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官)으로 개칭되었다. 즉, 마지막 성주인데 그는 자신의 성주 직을 반납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태종7년(1407)에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태종10년(1410)에 제주안무사가 되었다. 태종11년(1411) 아들 고상온(高尙溫)에게 세직(世職)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官)을 승습시켜 줄 것을 청하여 승계시키고 한양에서 죽었다.

태종실록22권 태종11년 8월 27일 기사에 〈제주(濟州) 도주관(都州官) 좌도지(左都知)는 신의 집안이 대대로 맡는 세직(世職)이니, 장자(長子) 고상온(高尙溫)으로 대신하기를 빕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고 되어 있다. 태종은 고봉례가 죽자 종이 150권, 초 10정, 쌀과 콩 40섬, 목곽 등을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고봉례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조3년 7월 7일 갑진 〈제주도 사람 고봉례(高鳳禮) 등이 말 1백 필을 바치니, 쌀 1백 섬을 하사하였다.〉


※태종4년 4월 21일 신묘 〈제주(濟州) 토관(土官)의 칭호를 고쳐, 동도 천호소(東道千戶所)를 동도 정해진(東道靜海鎭)으로 하고, 서도 천호소(潟千戶所)를 서도 정해진(潟靜海鎭)으로 하고, 도천호(都千戶)를 도사수(都司守)로 하고, 상천호(上千戶)를 상사수(上司守)로 하고, 부천호(副千戶)를 부사수(副司守)로 하고, 도지관(道之官)을 도주관(都州官)으로 하고, 성주(星主)로 도주관 좌도지관(都州官左都知管)을 삼고, 왕자(王子)로 도주관 우도지관(都州官右都知管)을 삼았다.〉


※태종7년 5월 8일 신유 〈고봉례(高鳳禮)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삼았다.〉
※태종10년 5월 4일 경오 〈말[馬]을 종친(宗親)·대신(大臣)과 근신(近臣)에 나누어 주었다.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 고봉례(高鳳禮)와 경차관(敬差官) 조원(趙源)이 말 1백 필을 바쳤으므로, 이 하사(下賜)가 있은 것이다. 봉례(鳳禮)는 제주 성주(濟州星主)의 후손(後孫)이다.〉
※태종10년 5월 14일 경진 〈고봉례(高鳳禮)가 양마(良馬) 6필을 바치니, 명하여 예전 예(例)에 따라 쌀 1백 석을 주고, 제주(濟州) 사람으로 고봉례를 따라 서울에 온 자도 차등 있게 쌀을 주게 하였다.〉


※태종11년 3월 10일 경오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에게 쌀 20석을 내려 주었다.〉
※태종11년 5월 13일 계유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의 아내의 상사에 쌀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또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으며, 사람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게 하였다.〉


※태종11년 7월 6일 을축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에게 쌀·콩 30석을 내려 주었다.〉
※태종11년 8월 27일 병진 〈제주(濟州) 사람 고상온(高尙溫)이 세직(世職)을 승급하도록 명하였다.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상언하였다. "제주(濟州) 도주관(都州官) 좌도지(左都知)는 신의 세직(世職)이니, 장자(長子) 고상온(高尙溫)으로 대신하기를 빕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11년 11월 19일 병자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에게 쌀 20석을 내려 주었으니, 고봉례가 큰 구리 화로[銅鑪]를 바쳤기 때문이다.〉
※태종11년 11월 29일 병술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졸(卒)하였다. 고봉례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대언(代言)에게 명하였다. "이 사람이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친척을 떠나 와서 벼슬하므로 내가 대단히 불쌍히 여겼는데, 지금 죽었으니 내가 몹시 슬프게 여긴다. 상장(喪葬)의 제구를 모두 부의하라." 양전(兩殿)이 모두 사제(賜祭)하고, 종이 1백 50권, 초[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


※태종12년 2월 11일 병인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고충언(高忠彦)으로 고봉례(高鳳禮)를 대신하여 제주(濟州) 도주관(都州官) 좌도지관(左都知管)을 삼았으니, 정부(政府)의 청을 따른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 〈본조 태종(太宗)2년 임오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와 왕자의 호가 너무 참람한 것 같다고 하여, 고치기를 청(請)하였으므로,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하였다.〉

탐라지, 증보탐라지, 고금사적 등에는 〈(제주)고을 東南 10리에 오랜 무덤 1구(丘)가 완연하다. 세간에 전해지기를 왕자묘라 한다.〉고 기록하였고, 고씨세보(高氏世譜)에는 〈좌도지관 고봉례의 묘가 화북 거로 지경에 부부합장묘로 안치되었다.〉라고 하였다.

묘의 구조는 가로 3m, 세로 4m 정도의 방묘(方墓)로, 2기가 90∼9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왼쪽 묘에는 두께 30cm, 가로 80∼100cm, 높이 70∼80cm 정도의 돌을 이용하여 벽을 세우고 그 속에 흙을 채웠었다.

판석석실형 고인돌을 연상케 하는 구조이다. 높이 70∼80cm 중에서 30∼40cm 정도는 땅 속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은 잘 다듬은 돌이 아니라 평평한 현무암 자연석을 사각형 모양의 직선이 되도록 일부 잘라내어 거친다듬한 것이다.

일부는 가로 세로 40∼50cm의 작은 돌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1997년 5월 5일 답사 당시 보니 발굴작업을 하다가 멈춘 상태인데 무덤 속에는 숯을 묻었던 것이 남아 있다.


오른쪽 묘에는 왼쪽 묘와 같은 큰 돌들을 사용하지 않고 직경 30∼40cm 정도의 자연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편평한 면을 바깥쪽으로 가게 하고 삐죽한 면을 안쪽으로 가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편평한 면을 이루어 왼쪽의 묘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이 무덤에서는 숯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묘를 성주묘라고 추정하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① 마을 사람들이 이 묘가 있는 곳을 '능동산'이라고 부른다. 능(陵)은 왕의 무덤을 말한다.
② 고씨세보(高氏世譜)상의 고봉례의 묘 위치와 일치한다. 즉 고씨집안의 족보에 고봉례의 묘가 거로마을 능동산에 '남변임좌(南邊壬坐)되어 있다'고 한 것과 현재의 묘 위치와 일치한다.

③ 방묘(方墓)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된 묘제(墓制)인데 시기적으로 볼 때 고봉례의 생존 연대와 같다.
④ 일반인의 무덤에 비해 축조 방식이 다르고 크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축조 방법은 물론 경사진 지형을 일정한 높이로 쌓고 시신은 방형의 곽을 만들어 깊게 묻은 축조 방식은 분묘조성시에 다수의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⑤ 이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봉례 성주의 사망 연대와 비슷한 시기의 것이다. 즉, 출토된 흑상감청자·백사청자·백자대접편 등 10편의 출토유물들의 사용 연대가 조선초기 이전인 점을 감안한다면 묘의 조성 시기가 늦어도 조선초기로 볼 수 있으며, 이 또한 문헌이 전하는 고봉례 성주의 사망 연대인 태종11년(1411)과 일치한다.(열린제주시정소식 1997. 4. 24)


왕조실록 태종11년 5월 13일 기사에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의 아내의 상사에 쌀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또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으며, 사람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해 11월 29일 기사에는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졸(卒)하였다. 고봉례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대언(代言)에게 명하였다.


“이 사람이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친척을 떠나 와서 벼슬하므로 내가 대단히 불쌍히 여겼는데, 지금 죽었으니 내가 몹시 슬프게 여긴다. 상장(喪葬)의 제구를 모두 부의하라.”


양전(兩殿)이 모두 사제(賜祭)하고, 종이 1백 50권, 초[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부부가 같은 해(1411)에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조선 전기의 권력가들의 묘제는 외곽에 판석으로 방형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토광을 설치하여 목관을 안치하는 장법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현재는 봉분을 다시 쌓아 복원했다.
《작성 050518, 보완 140326, 17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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