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들렁귀..오등동 방선문 홍중징(洪重徵)마애명 登瀛丘(등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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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들렁귀..오등동 방선문 홍중징(洪重徵)마애명 登瀛丘(등영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1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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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징의 이 시는 방선문의 성가를 배가시켰다고 평가한다.

오등동 방선문 홍중징(洪重徵)마애명 登瀛丘(등영구)
 

위치 ;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들렁귀) 가장 눈에 띄기 쉬운 곳 바위
시대 ; 조선(1739)
유형 ; 마애명

▲ 홍중징_등영구

 

▲ 오라동_마애명등영구

 

登瀛丘 영구(들렁귀)에 올라
石竇呀然處 돌굴 입을 크게 벌린 곳
巖花無數開 바위 틈 사이로 봄꽃 만발하였네.
花間管絃發 꽃 사이로 봄노래 피어나면
鸞鶴若飛來 난학이 아스라이 날아든다네.


洪重徵題 홍중징 지음
己未首夏 기미년(1739) 초여름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가장 멋있는 글씨체로 방선문의 풍경을 시로 읊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보아도 획이 꿈틀대는 듯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자연에 인공이 가해지면 훼손되는 것이 보통이나 홍중징의 이 시는 방선문의 성가를 배가시켰다고 평가한다.

셋째 귀절의 '開'와 넷째 귀절의 '來'를 운으로 하였다. 다른 곳에 새겨진 시에도 '開, 來'를 운으로 하여 선비의 문예 솜씨를 뽐내고 있다.

홍중징(1682∼1761)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영조14년(1738)부터 제주목사를 지낸 사람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중흠(重欽). 자는 석여(錫餘), 호는 오천(梧泉). 증 좌참찬 홍탁(洪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성현감 홍주천(洪柱天)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만조(洪萬朝)이며, 어머니는 증 참의 권진(權瑱)의 딸이다.


숙종37년(1711)에 진사가 되고, 171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군자감직장에 처음 제수되었다. 1715년 전적·병조좌랑·지평을 역임하고, 1717년 용인현감이 되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이 때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광주(廣州)로 물러나 있던 소론의 실세 최규서(崔奎瑞)와 많은 논의를 하였다. 그 뒤 1722년 병조좌랑·지제교를 역임한 뒤 이듬해 삭녕군수(朔寧郡守)로 나아갔다. 영조4년(1728) 장령을 지냈다.


영조14년(1738) 10월 이희하(李希夏)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영조15년(1739) 9월에 신병으로 인하여 사임하고 떠났다.

제주목사에 부임하자 흉년이 들어 조정에 진휼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공급된 나포미(羅舖米) 3천5백 석, 상진황모(常賑還麰) 5천 석, 저치미(儲置米) 1천5백 석, 씨콩 7백 석을 도민에게 나누어 주고 후일 상환하도록 하였다.

유생들을 예의로서 대접하고 향교의 「청금생안(靑衿生案)」을 마련하여 토목 역사 등을 면제해 주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1743년 병조참지를 거쳐 1747년 승지가 되었다. 1749년 한성부우윤, 1751년 형조참판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753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754년 공조판서에 이르러서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기(耆)는 연고후덕(年高厚德)의 뜻을 지녀 나이 70이 되면 기,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기소(耆所) 또는 기사(耆社)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장에 매우 능하였고, 만년에는 『주역』을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80세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고, 편서로 『완악편(玩樂編)』 3권·『경사증역(經史證易)』 2권·『좌역참증(左易參證)』 2권 등이 있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용연 바위에 취병담(翠屛潭)이라 음각된 마애명(磨崖銘)도 홍중징의 글씨이며, 제주향교에는 선정비(牧使洪公重徵立淸琴案碑)가 남아 있다.

온양동면 배병산에 묘지가 있으며, 성호 이익이 지은 홍중징의 묘지명(工曹判書致仕奉朝賀梧泉洪公墓誌銘 幷序)에는 〈무오년(1738, 영조14)에 장악원 정에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갔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국(耽羅國)이니, 남쪽의 아주 먼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지역이 멀고 일이 번다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기피하였는데, 공은 명을 받고는 부임하여 당무(當務)에 마음을 다 쏟으니, 섬 백성들이 편안해하였다. 기미년(1739) 가을에 체차되어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등영구'라는 제목 왼쪽에 '李命俊'이라는 이름이 크게 새겨져 있다. 이명준(李命俊)은 정조10년(1786) 4월에 부임하여 1787년 흉년이 제주를 강타했을 때 구휼에 힘썼으며 정조12년(1788) 3월에 신병으로 떠났다.

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 10월 18일 기사에는 〈탐라(耽羅)에서 정월부터 설진(設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명준(李命俊)이 진구(賑救)를 끝냈음을 아뢰니 엄사만(嚴思晩)의 예에 따라 이명준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제주(濟州)·대정(大靜)·정의(旌義) 세 고을의 기민(饑民)이 모두 4만 7천 3백여 구(口)이고 진곡(賑穀)은 8천 4백 석 영(零)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마치 자기 작품이거나 자기와 관련이 있는 작품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원조도 탐라지초본에 이 시를 이명준의 시라고 오판하였다. 남의 글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왼쪽에 판관(判官) 박창봉(朴昌鳳) 갑술초하(甲戌 初夏)라는 글자가 작게 새겨져 있는데 박창봉은 영조28년(1752) 제주판관으로 도임하였는데 공마분실사건으로 1754년 9월에 압송되어 떠난 사람이다.
《작성 120102, 보완 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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