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성산면장 오성남 등..수산2리 복구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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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성산면장 오성남 등..수산2리 복구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7.10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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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2리(고잡)은 중산간 마을이지만 초토화작전에 의한 희생은 없었다

수산2리 복구기념비


 

위치 ; 성산읍 수산2리 마을 입구
시대 ; 대한민국(1952)
유형 ; 기념비


비문 ;
〈앞〉復舊紀念碑
署長玄柄斗 言念再建 宦公協調 是誰之力 厥功感激
面長吳成南 部民依歸 拍手齊頌 莫匪爾極 不朽此石
〈뒤〉
里長 吳正國
主任 白河龍
社會係員 朴永錫
駐屯警官 朴炳壽
代表 高斗元 吳官律
〈옆〉檀紀四二八七年 五月 日 部民 一同

 

 

소개령 전에 수산리 주민들은 낮과 밤이 다른 상황을 겪었다. 낮에는 마을에 올라온 토벌대에게 시달렸고, 밤에는 무장대가 나타나 식량과 의복을 가져갔다.

무장대는 또 백지날인을 요구하는가 하면 토벌대의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한 도로 파괴 작업에 주민들을 동원했다.


수산2리(고잡)은 중산간 마을이지만 초토화작전에 의한 희생은 없었다. 1948년 11월 21일 경에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수산1리 주민들은 집을 비운 채 해안 마을로 피난했지만, 고잡은 같은 날 온 마을이 불에 타고 주민들은 황급히 해안 마을로 피난해야 했다.

하지만 오도가도 못하는 청년들이 인근 야산에 숨어 있다가 이후 토벌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수산리지에서는 앞과는 다르게 기록하였다.

즉, 소개령에 따라 해안 마을로 가도록 했지만 군경의 경비도 없이 명령만 내려졌기 때문에 소개 과정에서 산사람들이 들이닥쳐 산으로 가도록 강요함으로써 수산2리 주민들은 입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산1리와 2리 사람들은 열흘쯤 후인 12월 1일 경 수산1리로 복귀하여 집단생활을 하였다.(제주4․3유적Ⅱ 423쪽)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토벌대가 1구를 불지르지 않거나 주민들을 곧 마을로 돌려보낸 까닭은 이 지역을 토벌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의도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수산리를 방치해 무장대가 장악한다면 토벌대 주둔지인 성산리와 전선(戰線)이 너무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수산2리 살아남은 사람들이 1954년 들어서 마을을 떠난 지 6년만에야 수산2리를 복구할 수 있었다.

복구 사업 초기에는 둘레 580미터의 성안에 초가로 움막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이 복구를 기념해 마을 주민의 이름으로 1954년 5월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성산포경찰서장 현병두가 재건해도 좋다는 말에 관공서가 협조하여 재건하게 되니 그 공에 감격할 따름이며, 성산면장 오성남이 부민이 마땅히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오게 하였으니 그 공을 엄숙하게 박수로 기리며 영구히 남을 이 표석을 세운다’는 것이다.(수산리지 73쪽)


뒷면에는 이장과 경찰서 관련 직책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는데 주둔경관이란 수산2리에 주둔한 경찰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 2인의 이름을 적었는데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대표인지는 알 수 없다.


★현병두(玄柄斗. 1921∼1993)는 화북2동 거로마을 출신으로 1949년 9월부터는 제주경찰서 보안과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54년 성산포경찰서장이었다.


★오성남(吳成南)은 광무6년(1902)에 신풍리에서 유향별감을 지낸 아버지 오주식과 어머니 김유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소봉(小峰)이다.

어려서 족숙(族叔)인 청봉 오주언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업사(業師)의 뜻을 따라 정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20대 후반에 고향을 떠나 전남 진도에서 경찰공무원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우리 국민들이 많은 세금과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약탈을 당하고 특히 조선인의 황민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1939년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설정하여 협박과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행할 때에도 창씨개명 반대에 앞장섰고 결국은 12면만에 공직을 그만두고 신풍리로 귀향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뛰어난 능력이 아깝다며 추천하여 성산면사무소에서 행정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성품이 강직한 그는 민족혼을 일깨웠고 공출을 줄이기에 진력하였다. 정의향교 훈장을 지냈으며 해방후에는 초대 신풍리장을 지낸 그는 리민들과 성산면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제5대 성산면장을 지냈다.

면장 재임시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피난민 보호와 마을 피해 복구, 구호사업에 행정력을 종동원하여 면민의 칭송을 받았다.

지역민들과 애환을 같이 하며 청렴하게 살다가 1960년 세상을 떠났다.(냇가의 풍년마을)
《작성 080111, 보완 170406, 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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