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대정지역 3대 의숙..하모리 광선의숙터
상태바
[향토문화]대정지역 3대 의숙..하모리 광선의숙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1.29 07: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건물은 흔적이 없고 그 터에 모슬포제일교회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모리 광선의숙터
 

위치 ; 대정읍 하모리 1076-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교육기관
관련 ; 독립운동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에서는 보통교육과 신교육이 실시되면서 교육의 대중화와 집단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립보통학교는 제주보통학교(1907), 정의보통학교(1909), 대정보통학교(1911) 등 3개교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통학권을 벗어난 마을에서는 개량서당, 의숙을 주민 스스로 개설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광선의숙은 1920년 7월 우면(현 대정읍) 하모리에서 문을 열었다. 윤식명(尹植明)목사와 최정숙(崔正淑) 장로에 의해 남녀공학으로 설립되었고, 숙장은 최정숙, 원용혁(元容赫, 추자), 강규언이 맡았고, 교사는 강규언(姜圭彦, 중문.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대구형모소에서 8개월 복역), 정동규(鄭桐圭, 일도.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6개월 복역), 정을수(鄭乙洙, 정동규의 누이), 최정숙, 원용혁, 문공언, 정신경, 조창일, 조창국, 박용후 등 민족의식이 투철한 크리스찬들이었다. 기독교의 박애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 방침을 세우고 모슬포교회의 부설기관으로 운영하였다.


윤식명 목사는 의숙을 개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북노회로 옮겼으며, 그 후임으로 온 이경필 목사는 일시 중단 상태에 있던 광선의숙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전남노회에 광선의숙 사숙비를 지원해 줄 것을 청원하였고, 광주 순천 목포 지방을 돌며 사숙비를 모금하였다. 타마자 선교사가 부족액을 담당하여 사숙비가 다 모아지자 이경필 목사는 1923년 보습과를 부설하여 의숙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같은 해 이경필 목사는 모슬포교회 부인전도회를 조직하고 부인야학까지 설립하여 여성들의 문맹퇴치에 기여하였다. 윤식명 목사가 처음 의숙을 개설할 때에는 소학교 6학년 초등교육과정이었지만, 이경필 목사는 고등소학 2학년 과정의 보습과를 두어 지방 청소년 교육에 기여하였다. 광선의숙에는 멀리 서귀면 법환리에서부터 구우면(舊右面) 두모리까지 각지의 청소년들이 모여들어 공부하였다. 당시 광선의숙은 가파도의 신유의숙과 하모리의 한남의숙과 더불어 대정 지역 3대 의숙으로 통칭되었다.


학내 분위기는 의숙 명칭이 조선광복(朝鮮光復)의 뜻을 가진 광선(光鮮)이라 할 정도로 항일투쟁에 헌신하는 자가 많아 늘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실제로 일본 경찰이 감시하는 가운데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강규언은 전북 옥구 소재 영명(永明)학교 4학년 때 3․1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8개월 징역형을 복역한 후 출감한 항일운동가였다. 광선의숙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가가 된 사람으로는 진성국, 원용덕, 박용후, 이신호, 이운방 등이 있다.


강규언의 제자인 진성국(秦聖國, 용수)은 1926년 18세 때 만주로 망명하여 동만주의 한인학교인 동흥(東興)중학의 강사가 되었다. 그는 1927년 동만주청년동맹위원장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그 해 10월에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29년 4월에 풀려나 귀향하였으나 고문후유증으로 1930년 2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했다.


광선의숙은 이렇게 항일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등 민족운동의 장이 되었으므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1929년말에 문을 닫고 말았다.(2007 南濟州文化遺蹟 103~104쪽, 2016 대정읍지Ⅱ 425∼426쪽) 현재 옛 건물은 흔적이 없고 그 터에 모슬포제일교회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작성 080622, 보완 17010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