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한국전쟁 ‘제20수용소’..하모리 중공군포로수용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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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한국전쟁 ‘제20수용소’..하모리 중공군포로수용소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02 0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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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리 중공군포로수용소터
 

위치 ; 대정읍 하모리 76번지. 산이수동 해안도로 대정하수처리장 길 맞은편 밭 하나 건너 북쪽
유형 ; 건물터
시대 ; 대한민국
관련 ; 한국전쟁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수용소였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 수용소의 정식 명칭은 ‘제20수용소’였다.

물이 나는 곳을 찾아 설치하다 보니 이곳에 세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특히 북한군이 아닌 순수하게 중공군 포로들만 수용된 수용소의 특성을 볼 때 냉전시대의 산물이자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나 다름없다.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참전했던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침투한 것은 연합군의 북진이 한창이던 10월 19일이었다. 연합군이 한중(韓中)국경을 향해 계속 진격하자 중국이 9월 25일 이후 5차례에 걸쳐 개입 가능성을 경고했는데 그것을 실제 결행한 것이었다. 연합군도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긴 했으나 소규모에 그칠 것이라고 과소평가하고 있었다.(http://ghostent.new21.org/ 김두영의 작은세상)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당초 거제도가 아닌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려 했으나 당시 제주도에는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됐고, 사용할 물이 부족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어 최종적으로는 거제도로 선정됐다.

모슬포 포로수용소는 1951년 2월 설치된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북한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등 17만명에 이르러 수용한계에 달하면서 같은해 6월 중공군 포로 5600명이 LST상륙함에 태워져 모슬포항으로 들어오면서 설치됐다. 이후에 이송된 포로들까지 합하면 14,000명(제주일보 150714)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다.


수 천여 명의 중공군 포로들이 모슬포에 머물면서 아일랜드 출신 설리반 군종신부는 이들을 위한 사목활동을 펴기도 했는데 모슬포 성당 기초공사는 포로들을 동원해 마무리했다. 1952년 중반 정전 및 포로송환 회담이 본격화되고 중공군 포로들이 떠나자 모슬포 성당은 건축계획이 변경돼 건물 규모가 축소되기도 했다.(제주일보 081010)


이렇게 수용되어 있다가 1952년 10월 1일(소련혁명기념일)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폭동을 일으켜 42명이 죽고 120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이들은 탈주 후에 한라산에 있는 인민유격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포함한 중공군 포로들은 휴전 후에 포로교환 협정에 따라 송환되었는데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나뉘면서 난동이 발생해 사상자들이 나왔는데 모슬포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은 반공포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년 정도 수용소에 머물던 반공포로들은 타이완으로, 친공포로들은 본국(중국)으로 송환됐다.(제주일보 081010) 포로수송항을 모슬포항으로 하고 수송 시간대도 남의 눈에 잘 띠지 않는 새벽으로 정했었다.(사건50년 제주반세기 111~113쪽)


포로수용소 건물은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엇으나 당국이 사실상 방치하면서 주목을 받지 못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1980년대 밭 개간 등으로 대부분 없어져 남아 있는 건물은 벽체뿐이다. 길이 20m 남짓, 높이 2m 정도의 석축벽에 창틀 모양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송악산 근처에는 이곳 이외에도 또 다른 높이 2m 정도의 수용소가 2곳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1996 이런디알암수꽈 171쪽) 상모리 이교동에서 만난 주민은 하모해수욕장 동쪽에서 비행장 사이에 수용소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현장 주변의 지역 주민들은 십수년~20년 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증언하였다. 즉 1980년대 초반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일보(150714)에 따르면 포로수용소가 운영되던 당시에 이곳에서 보초근무를 했던 분이 지금도 생존해 계시다고 한다.


한편 제주도에는 현재의 국제공항 자리에 거제도에서부터 말썽을 부리던 5천여명의 악질적인 중공군 포로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터를 다지고 막사를 짓는 데 동원되는 등 노역을 했다.
《작성 080622, 보완 1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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