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947년경부터 원동산 민가 기거.. 중문동 서북청년회사무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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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947년경부터 원동산 민가 기거.. 중문동 서북청년회사무소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2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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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산은 중문 마을의 서쪽 진입로로 중문의 관문이다

중문동 서북청년회사무소터

위치 ; 서귀포시 중문동 2165번지 중문바다낚시 건물 자리
유형 ; 건물 터
시대 ; 대한민국

 


중문동에서 서북청년회가 집단적으로 머문 것은 4.3 발발 1년 전부터였다. 서청은 1947년부터 10명 정도가 중문의 원동산 민가에 기거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9명인 것 같다.(중문동 고경준, 1933년생. 1996년 6월 면담) 원동산은 원래 원동산 아랫자락에 중문원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명칭이다. 안두혁(작고)씨는 4.3 전부터 횡포를 일삼던 서청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서청은 처음엔 원동산에 있는 한 민가의 사랑채를 빌려 약 10명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는 일 없이 무전취식을 일삼았습니다.

민가에 가서 쌀이나 돈을 강요했고, 관공서에 가서도 '국민배급'을 달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이 때 서청의 감정을 산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서청의 위협 때문에 경찰에 투신했다는 이기호씨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했다.


"난 본래부터 국민회 등에서 우익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우린 불과 10명이었고 대부분은 인민위원회 소속이었으니 주변으로부터 나무람을 받으며 활동했지요. 그러던 중 유해진 지사가 1948년 5월경 면사무소 공무원들을 우익 인사들로 대거 개편했어요.

즉, 그 전에 있던 중문면장 이봉옥(李奉玉), 부면장 이승조(李承祚, 중문중학원장 겸임)를 파면하고 독립촉성국민회 간부인 조창국(趙昌國, 애월리 출신)을 중문면장에, 국민회 간부인 원기영(元氣榮)을 부면장에 임명했습니다.

또 우익 인사 박돈재(朴敦在)를 총무계에 앉히고, 내게는 '면사무소 산업계 서기로서 양곡을 장악하라'는 임무가 부여됐습니다. 그런데 서청이 문제였어요. 서청은 본래 비무장이었는데도 민폐를 심하게 끼쳤습니다.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내 기억으로는 처음엔 500원을 받다가 1천원으로 올렸어요. 당시 1천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서청은 면사무소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면 회계원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내게는 쌀을 강요했어요.

당시엔 원칙적으로 수확한 양곡은 전부 공출한 후에 이를 다시 배급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면직원들은 절량(絶糧) 농가를 조사해 특별배급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서청은 특별배급을 요청하면서 자기들 인원의 5배를 달라고 떼를 썼어요.

내가 못한다고 버티자 면장과 부면장에게 압력을 가했어요. 그 일로 면사무소에서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난 우익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담벼락에 날 숙청하라는 좌익 삐라가 나붙어 위험을 느끼던 터였는데 이번엔 서북청년단에게 밉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1948년 10월 30일에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서귀포경찰서에 있다가 11월 5일 중문지서 피습 사건이 나니까 내가 중문 출신인 점을 감안하여 1달간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중문지서에 온 지 보름만에 중문리에서 서청에 의한 대대적인 주민 학살이 있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직전에 경찰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서청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원동산은 중문 마을의 서쪽 진입로로 중문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청은 1947년경부터 중문 원동산 민가에서 기거했다. 현재 그들이 기거했던 집자리에는 '중문바다낚시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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