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깨끗하게 보존된 성벽..대포동 안성(內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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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깨끗하게 보존된 성벽..대포동 안성(內城)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14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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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마을에서 북쪽과 동쪽은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

대포동 안성(內城)
 

위치 ; 서귀포시 대포동 1520번지 북쪽(마을 동쪽)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

 

 


안성(內城)은 대포동 노인회관 옆 길로 들어가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에덴어린이집이 있는데 이곳에서 조금 20여m 더 가면 '구린길68' 번지가 붙어 있는 집에서 북쪽으로 한 집 건너면 성이 남아 있다.

높이 2m, 폭 1m, 길이 40여m 가량인데 높이만 낮아졌을 뿐 성벽은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다. '구린질87'번지 집 북동쪽 울타리가 마을 성의 동쪽과 북쪽이 만나는 모퉁이였다고 한다. 모퉁이 부분은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대포마을에서 북쪽과 동쪽은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안성'과 '밧성'의 사이는 5m 정도였으며, 여기에는 산사람들이 침입을 막기 위해 '줄가시낭'(큇가시낭)을 삽목하였다고 한다. 밧성이 남아 있는 곳은 없다.


"지금 마을회관 자리에 중문지서 파견소가 있었다. 나는 이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조원 역할을 했습니다. 보조원은 17,8세 난 남자들인데 낮에는 경찰관 1명과 함께 사무실을 지켰고 밤에는 민보단 간부들이 교대로 근무했다."(김항선)


"스물다섯살 때 4·3 사건이 일어났는데 무장대의 습격은 없었다. 축성을 한 뒤에는 민보단을 조직하여 죽창 들고 보초를 섰다.

밤에는 6명에서 10명 단위로 조를 편성하여 동쪽 '꿩망동산'(현재 중문상고 앞)에서 서쪽 '장운다울'까지 성 바깥 지역을 교대로 순찰을 돌았는데 순찰 돌 때 가장 위험을 느꼈다. 낮과 밤에 한 번씩 서귀포경찰서에 이상유무를 연락했다."(이창옥)


"1569번지 우리 집이 5,6년 동안 중문지서 대포파견소로 이용되었는데, 주로 순경 1명씩 살면서 근무했습니다. 원희창, 정대진 집에 순경이 가장 오래 상근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반장 책임하에 반별로 돌아가며 파견된 순경의 식사를 담당했는데 반찬은 주로 달걀 지짐이였습니다. 4·3 사건 중엽부터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대포리에 재향군인 사무실을 개설하고 이북 출신 원 아무개가 책임자로 있었는데 그는 마을 청년을 못 살게 굴어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대포리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의 가족들은 1960년대에 모두 서울로 이사했습니다."(강영범)(큰갯마을 228∼230쪽)


당시에는 마을 주민 전체가 성 쌓는 일에 동원되었었지만 원씨는 마을 성담 쌓는 데는 동원되지 않았고 당시 중문중학교 학생이었으므로 학생연맹에 편성되어 중문에서 성을 쌓았다.

학생연맹원은 지금의 제주은행 자리에서 합숙훈련을 했기 때문에 귀가하지 못하고 성을 쌓거나 2~3명이 죽창을 들고 토벌대 군인을 보조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2008년 8월 19일 대포동 주민 1932년생 元世允씨와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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