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환경문제 심각성 알았더라면, 제주개발 못하게 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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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환경문제 심각성 알았더라면, 제주개발 못하게 했을 것.."
  • 고현준
  • 승인 2020.01.23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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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와의 신년인터뷰)생명의 의미 전하는 원로화가 고영만 화백에게 듣는 그림이야기

 

고영만 화백

 

 

“지금처럼 지구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제주도민들은 제주도 해변가 2-3백미터 안으로는 절대로 개발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몇분 안 되는 원로화가라고 불리워도 좋을 나현 고영만 화백(84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한라산과 관련된 거대한 그림이었다.

아직 작업중인 그림이라 자세히 소개는 못하지만 그림 제목은 미리 정해 놓고 있었다.

“한라산도 생명이다.”라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 대해 설명하며 고영만 화백은 “개발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를 지키면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을 한정시켜서 생태계는 더 이상 파괴하지 말고 해변생태계와 고지대는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조금이라도 개발의 위협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제주의 난개발을 걱정했다.

더욱이 “지금이라도 무분별한 개발은 막아야 한다”며 이 한라산 그림이 주는 생명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줬다.

 

“제주도민들이 옛날에는 환경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껴 제주환경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 고 화백은 “언제부턴가 제주도는 외국처럼 건물을 높이 올려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다”는 우려도 전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직 건재를 과시하듯, 그동안 그는 어머니와 관련된 그림에 이어 제주도 신화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는 생명과 환경,생태에 대한 그림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어릴 적 일찍 부모를 여읜 고영만 화백은 그림이 좋아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미대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홀로 먹고 살기 위해 이발소에서 일을 하고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임시로 운영했던 공군병원 등에서 청소 일을 하며 근근이 끼니를 해결했다"는 고 화백.

그런 그가 제주사범학교를 나와 59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14년을 근무하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술 전문과목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중등교사 자격 시험에 합격해 중학교 교사로 25년간 일하는 등 지난 2000년 명예퇴직 할 때까지 교사로 있으면서, 생활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었던 자신의 삶을 감사하듯 회고했다,

 

그림을 좋아할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그냥 그림이 좋았다는 고 화백.

“어릴 때 그림 그리고 있으면 할머니들이 지나다가 환쟁이 밥 굶나 하는 소리도 들었다”는 고 화백은 “그 분들은 예술가는 가난하게 산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었다”며 “어릴 때는 예술이니 뭐니 하는 생각도 없이 그냥 좋아서 하다 보니 지금까지 화가로 살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어릴 적 제주시 북초등학교 근처 영덕골에 살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던 북초등학교는 6.25전쟁 때 공군이 제주도에 주둔할 때에는 공군병원이 있었다.

그는 병원에 심부름하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해서 동네 우물물을 길어다 청소하는 일을 하며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오랜만에 배부르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부모 없이 홀로 살아야 하는 비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때도 그는 그림을 그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전쟁고아들을 서울에서 모아 와서 옛날 농고 건물에 고아를 수용했다.

2-3세 유아들부터 15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전농로에 농고 운동장이 있었는데 조금 큰아이들은 콘센트라는 야영할 때 쓰는 미군 천막에서 살았다.

고 화백은 그 때도 “자꾸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군인들이 원장에게 소개해줘 미술반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일화도 전해줬다.

“미국에서 옷이나 학용품을 원조 받았는데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크리스마스 때 원장이 일일이 카드를 써서 보냈는데 그 카드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렸고 미술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아 고쳐주곤 했는데 그때가 16세였다”는 것이다.

잿부기 삼형제(오른쪽)

 

고 화백은 “화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만 중학교 때 이미 계속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을 했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화가라는 생각을 했고, 그때까지는 그냥 열심히 그리기만 했다”는 것.

고 화백은 “당시는 어떤 예술가가 되겠다는 높은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그냥 그림이 좋아 자꾸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화가로써 그려낸 그의 신화이야기 속 대표작 '잿부리 삼형제'는 제주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그림도 제주신화를 모티브로 삼아 그리게 됐는데 그 또한 이유도 복합적”이라고 한다.

“학교를 그만 두고 난 후인데 집에 있다 보니 제주의 옛날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났고 사진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 했었다”는 얘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옛날 생각이 자꾸 떠올라 이건 그림으로 그려서 후대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담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신화시리즈 였다"는 것.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선생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게 한으로 남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세상이 변해 옛날 모습이 자꾸 사라지는 모습이 너무 아쉬워 제주신화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옛날 사람은 당시 제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지만 나는 그림으로 제주도의 옛모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린 것인데 내용이 좋다고 해서 이 작픔들을 모아 탐라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개인전도 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진이 유일한 유품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작업실에는 흑백으로 된 어머니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이 사진 한장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유품”이라고 전한 고 화백은 “이 사진도 도민증 사진을 확대한 것”이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는 심정을 전했다.

그림도 그렇게 어머니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다가 제주신화에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고 화백은 “제주도 사람들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물 한잔이라도 떠서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고 돌부리에 걸려 아이가 넘어지면 그 돌 앞으로 가서 기도를 올리는 제주 어머님들의 모습에서 제주사람들은 신과 함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그래서 제주에는 신이 1만8천신이 있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했다.

고 화백은 ”외국에 가보면 조형물이나 그림들이 많지만 제주에는 그런 게 없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를 신목으로 믿기도 하는데, 제주신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당시에는 마침 제주와 관련한 신화책도 나오기 시작해서 신화책을 보면서 결국 신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고 한다.

”의지할 곳이 없고 힘들 때 신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제주 사람들이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그는 ”신화를 미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런 마음이 제주도의 순박한 사람들을 살려낸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요즘은 생태환경문제를 다룬 생명에 관한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그동안 그기 그린 그림속에는 쓰레기 문제와 환경파괴 등의 실질적인 문제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는 ”사실 생태,환경에 대한 그림을 그린 지는 오래 됐다“고 전했다.

제주도에 도로개설을 처음 할 때부터 중산간 마을의 나무들을 마구 베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시작하게 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그림을 그리러 해변가를 다니면서 보면 옛날에는 바다냄새가 참 좋았는데 지금은 쓰레기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앞으로 바다 물고기들이 못살게 되겠다는 우려로 생태환경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생태,환경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화백은 “처음에는 옛날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지만 얼마전 까지는 선 작업을 통해 자연이 왜 아름다운가를 전하고자 노력했다”고 전했다.

“아름다운 요소는 변화”라고 강조한 고 화백은 “자연은 변화와 조화를 이룬다"며 "이 세상에 소나무만 있다면 결코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고 화백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양새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왜 자연은 다양할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식물의 섬유질이다.

식물의 섬유질을 생각해 보면 선으로 돼 있고 그 선들이 조직을 다양하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무슨 룰처럼 규칙에 따라 선과 조직이 달라지며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을 알고 나서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선으로 그린 작품은 마치 반 고호의 그림처럼 보인다는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자연에 가깝게 가늘게 그리다 보니 팔과 어깨가 아파 오래 하지를 못했다고 한다.

다음에는 환경오염으로 식물이 죽어가고 새들도 죽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그림을 그렸지만 이 작업이 시간이 많이 들고 너무 힘들어 요즘에는 다시 붓으로 그리는 작업으로 돌아왔다.

선 그림에서 기법을 달리해 그 모든 의미를 담아 하나로 나타내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 화백이 찾아낸 기법이 모든 것을 하나로 표현하는 '알'이다

알을 잘 보호하면 병아리가 돼서 생명이 되지만 그냥 내버리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 알로 세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그렇게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최근에는 알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생태계가 환경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고 화백은 이를 “생명과 공간의 미학”이라고 전했다.

그런 의미를 담아 그의 그림에 생명과 공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또한 오래 됐다고 한다.

"늘 굶지 않고 춥지 않으면 이것(미술)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고영만 화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화가였다.

 

84세를 산 노 화백에게 세상을 잘사는 방법에 대해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부탁했다.

“사람은 다 제 나름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 고 화백은 “욕심내지 않고 자식들에게도 뭘 어떻게 사는 게 좋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보통이면 좋다고 한다”고 전했다.

1녀 3남를 둔 고 화백은 “모든 일은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라며 “좌절할 때도 있지만 그걸 극복해서 뛰어 넘어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주도를 위해서는 “도민 모두가 버리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전한 고영만 화백.

고 화백은 “우리가 몰라서, 제주도의 부동산 개발을 막지 못했지만 옛날 제주에서는 통시에 돼지를 키우면서 음식물 처리를 다 했다”며 “공장에서도 기업이 생산한 쓰레기는 업체가 수거해서 재활용에 나서는 등 환경에 피해가 안 가도록 책임을 져야 환경을 위한 기업이라 할 수 있다”는 조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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