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조선시대에 원(西院)이 있었던..소길리(상가리) 원동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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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조선시대에 원(西院)이 있었던..소길리(상가리) 원동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2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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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오가는 사람들에겐 沙漠(사막)의 오하시스이기도 했었으나..

소길리(상가리) 원동마을터

 

위치 ; 애월읍 상가리(소길리) 원동. 제주경마장 서쪽 약 2km 지점 평화로 원동교차로 부근, 애월읍 소길리 1364번지 일대(제주시 방향에서 서부 산업도로를 8키로 가다 애월 방향과 웅지 리조트 올라가는 길 왼쪽 집두채 옆에 있음)
유형 ; 마을터(잃어버린마을)
시대 ; 대한민국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西院)이 있었고 원을 근거로 해서 마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길의 중간에 위치했다. 길은 제주목관아 앞에서 제주향교-오리정(현 국제공항)-정존(노형초등학교 일대)-광령-서원-동광-인성리로 하여 대정현에 다다르게 되어 있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소길리, 서쪽은 상가리에 해당되었으나 전체 16가구 중 상가리 지경에는 약 5호 정도밖에 살지않아 보통 소길리로 취급됐다. 주민들은 주막을 운영하던 1가구 외에 주로 메밀, 산디, 조, 콩 등을 경작하거나 마소를 키우며 생활하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4.3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13일(음10.13.) 국방경비대 제9연대 군인들은 인근 하가리와 상가리 주민을 학살하고 새벽녁 원동으로 올라왔다. 토벌대는 원동을 기습해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다. 1948년 7월 15일부터 11연대와 9연대가 재편성되어 송요찬 연대장에 의해 소탕작전을 벌였는데 이 당시 토벌작전은 '토끼몰이식 수색작전'(한국전쟁사I. 437-444쪽)이라고 얘기될 만큼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군인 토벌대들은 가가호호 주택을 급습하여 잠자는 주민들을 후레쉬로 비춰가며 밖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군인들은 주민들을 연결 포박하여 마을 주변의 무장대 은신처를 가리키라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원동마을을 지나는 사람들도 무차별 체포했다. 이날 오후 6시쯤 되자 군인들은 연대본부에 무선연락을 취해 학살 집행을 하달 받고 밤 11시쯤에 주민들을 총살한 것이다.


이 날 학살은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주민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대부분 도피하지 않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군인들은 마을에 하루종일 머물면서 주민 40여명과 길가던 사람들을 포함해 60여명을 마을 중심인 속칭 '주막번데기'에 모아 놓고 총을 쏘아 학살했다.

이 마을 희생자는 현두병(50), 현창하(20), 현봉한(14), 강기송 외 가족 1명, 이두익 외 가족 2명, 김기용, 김승홍, 길길홍, 김유홍 등이다. 소길리의 임세옥(20)과 고원효(21)는 원동에서 방목 중이었던 가축을 돌보러 갔다 희생되기도 했다.

군인들은 시신에 이불과 옷가지 등을 얹어 휘발류를 뿌려 불을 지르기도 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만이 학살의 와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군인들이 가버리자 가족 시신을 찾아 임시로 흙만 덮어 가매장을 했다. 이 시신들은 1년 후 정식으로 매장됐다.(제주4·3연구소 홈페이지)


토벌대가 3일 후에 다시 마을로 들어와 모든 집들을 불태워 버리자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를 내려왔다. 그들은 지금도 하귀, 고내, 곽지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 원동은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지. 그 때 내가 열일곱 때야. 그 일이 나기 전에 어머니께서 '너 열일곱살이라고 하지 말고 열두살이나 열살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

까망 치마를 입었었지. 치마를 푹 뒤집어쓰고 애기를 하나 업고 구석에 있으니까 군인이 와서 '너 왜 여기 앉아 있어?' 하고 물어보는 거야. '중대장님이 아이들 밥해 주라고 보내 주었어요.'라고 대답하니까, '너, 여기 가만히 있어 봐. 확인하러 갔다 온다.' 하고 가길래 무서워서 애들을 데리고 저쪽(머흘곶) 가시밭길로 막 도망을 쳤어.

가만히 숨어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돼지 태우는 냄새 같은 냄새가 막 나는 거야. 사람들을 죽여 놓고 불을 질러 버리니까 그랬던 거지. …… 머흘곶에 숨어서 한 사나흘 있다가 배가 고파 가지고 아무거나 찾아 먹으려고 나왔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죽었지 뭐야.

이마가 갈라진 사람, 배 창자가 나와 죽은 사람, 다리가 부러진 사람, 죽은 사람 천지야. 엄청 많이 죽었어. 원마을 사람들뿐만 아니고 다른 마을 사람들도 죽었어. 죽은 사람이 60명은 되는 것 같았어. …… '어머니 아버지도 다 죽고 난 어떻게 사느냐?'고 군인들한테 말하니까 '그럼 하귀로 내려가라.'고 하대. 나는 막 땅바닥에 뒹굴면서 '차라리 몰살시켜 달라. 어떻게 어린 동생들하고 살아 가느냐?'고 울고불고 했지.

그랬더니 군인들이 '누가 그렇게 죽였냐? 빨갱이들이 그랬냐?' 하는 거야. '당신네들이 그랬잖아요.' 하니까 그 군인들도 고개를 돌려 버리더라고. …… 아버지 어머니 시체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 어머니는 머리도 다 타 버려 가지고 알아볼 수 없었는데 나중에 손을 보니까 겨우 알 수 있더라고.

어릴 때 방망이질하다가 찧어서 뭉툭해져 버린 손가락을 보고 알아보았지. 시체를 뒤집어 보니 타다 남은 내복 조각이 영락없는 어머니 꺼야. 아버지는 가슴하고 허벅지에 총을 맞았더라고. 결국 찾아 가지고 묻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대문을 뜯어 겨우 개판을 해 묻었지. ……"(원동 출신 □□□할머니의 증언)


고남보(2007년 76세)씨는 4·3 당시 17세이었으나 원동 마을 주민들이 죽어 갔던 1948년 11월13일 당일에는 포박했던 끈을 풀고 도망친 후 마을 인근의 '뒷머흘' 곶자왈에 숨어 죽음의 총소리를 들으며 겁에 질린 채 3일간을 숲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 학살이 있은 후 3일만에 마을에 들어와 죽음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아수라장이었습니다.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태워버리니까 피가 범벅이 된 몸은 다 타지 못해 바람이 불면 벌렁벌렁 흔들리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누이동생, 그리고 어머니 등에 엎혔던 동생이 여기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엎은 채로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죠. 요즘 제 고민은 생전에 누이와 동생의 시신을 편안한 곳에 안장하는 일입니다. 두 동생의 시신은 집터 뒤에 그대로 가매장한 채 있는데 집터는 무성한 잡목 속에 덮여 있어 찾기가 힘듭니다."(고남보씨 증언)


당시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늙은이들과 어린 아이들 30여 인이 하귀, 곽지, 고내 등지로 소개되어 40여 년 간 고향을 등진 채 피해의식에 젖어 자기 땅이 어딘지도 모르고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최근에 조상들이 살았던 땅과 잃어 버린 삶을 찾아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90년 가을, 이곳 원동 유족들은 옛 마을 터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부모와 마을 주민들을 위로하는 '무흔굿'을 벌였다.


"무자년 음력 10월13일 군인들에게 희생당하고 어린아이들 몇 명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해변가나 고아원으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순식간에 부모를 비명에 보낸 아이들은 냉대와 굶주림 속에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며 원통함과 그리운 마음을 가슴 속에 꼭꼭 묻고 이제 어언 40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나깨나 비명에 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드리지 못함을 자식된 도리로서 항상 뼈저리게 안타까워 몸부림치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돌아가신 분들의 영전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자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1990년 9월22일부터 이틀간 유족들은 홍보물을 통해 위령제를 지내는 이유를 설명하고 몇 년 전 확인한 조상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법정투쟁을 벌일 것을 공표했다. 법정투쟁은 유족들이 자신들의 땅을 1960년대 정부가 추진하던 대규모 조림사업을 맡아 하던 사람들이 '임야 소유권 이전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빌미로 명의이전했다며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상들의 땅이 어느 사이엔가 남의 소유로 넘어가 버렸고 소송까지 했지만 일부밖에 찾지 못하였다.


지금은 평화로가 확장되면서 당시 원동 마을 중심지였던 옛 도로 주변은 거의 당시 원형이 사라졌다. 이곳 마을의 후손 김화숙(재일동포) 씨가 세운 '院址'라 쓴 돌이 있어 마을터임을 알려 주고 있을 뿐이다. 표지석 뒤 하천 건너편에는 당시 주민들이 살았던 집터들이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평화로가 확장되면서 당시의 학살터, 집터가 도로에 편입되었고, 건물들이 들어서는 등 개발바람으로 많이 훼손돼 마을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김화숙씨가 세운 院址라는 제목의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太宗(태종) 十六年에 濟州牧(제주목) 大靜縣(대정현) 旌義縣(정의현) 三邑이 鼎立(정립)될때 원이란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 出張(출장)하는 官使(관사)들에게 宿食(숙식)의 便宜(편의)를 주기 위하여 宿泊所(숙박소)를 두게 하였고 이에 따라 五.六채의 人家(인가)가 形成(형성)되어 農耕(농경)과 牧畜業(목축업)에 종사하던 地域民(지역민)들이 이곳을 지날때에는 잠시 休息(휴식)을 取(취)하고 渴症(갈증)을 풀었었다.

이 마을은 8.15(八.一五) 解放(해방)때까지 남아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에겐 沙漠(사막)의 오하시스 이기도 했었으나 四.三 以後(이후) 사라지고 해가 바뀔수록 도민의 생각 속에서 잊혀저 가는 것이 안타까워 人家(인가)가 있던 이 마을에 정성(精誠)을 새겨 이 돌을 세운다. 1990년 8월 14일 金和叔》


(전교조제주지부, 제주역사기행 자료 유인물), (한라일보 2007년 7월 24일 오승국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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