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한말의 대표적인 지식인..일도1동 김윤식적거(金允植謫居)터
상태바
[향토문화]한말의 대표적인 지식인..일도1동 김윤식적거(金允植謫居)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07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윤식과 이승오는 지방 문인들과 교유, '귤원시회'(橘園詩會)를 만들어 시회 열어 지도

일도1동 김윤식적거(金允植謫居)터

 

Kim Yunsik's House of Exile
지역 ; 제주시 일도1동 1108. 운주당로43.
유형 ; 위인선현유적
시대 ; 조선말기~일제강점기

 

 

김윤식은 헌종1년(1835)∼1922. 한말의 관료·문장가이다.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서울 출신. 이조판서·좌찬성 익태(益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실학사상의 선구자인 김육(金堉, 1580~1658)의 9세손이다.

경기도 광주시 귀천(歸川)에서 태어났으며 숙부(叔父)인 청은군(淸恩君) 익정(益鼎)의 집이 있는 양근(楊根)에서 성장하였다. 유신환(兪莘煥)·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 본관은 청송. 생전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사건들을 겪었다.

한말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역사적 격변기에 고통스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이를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집권층에서 소외된 가문의 장년층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청의 세력에 편승하여 갑신정변을 좌절시킴으로써 수구파에 일조하고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 초에 걸친 청의 종주권 강화와 보수파의 반동세를 가속화시키는 일들을 했다.


고종2년(1865)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여 건침랑(健寢郞)이 되었고,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황해도암행어사·문학·시강원겸사서·부응교·부교리·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영선사로 청의 신식무기 제조법을 배워왔다. 정부의 개항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로 학도와 공장(工匠)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가서 그들을 기기국(機器局)에 배속시키는 한편, 연미사를 위하여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청나라 체류중에 임오군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하여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선대원군제거방략 등을 제의하여 청나라 개입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하였다.


임오군변이 수습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된 후인 그해 9월 종사관 김명균(金明均)을 대동하고 재차 청나라로 건너가 학도·공장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으며, 각종 기기를 도입하여 기기창(機器廠)설치의 기반을 마련하여 놓았다. 군변수습 후 중용되어 호군(護軍)·강화부유수에 임명되어 규장각직제학을 겸임하였다.


강화부유수로 있을 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도움으로 5백명을 선발하여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였는데, 이 영군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중국식으로 훈련되었으며 갑신정변 때 상경하여 궁중수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의 설치에 따라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協辦統理內務衙門事務)로 임명되었고, 그 뒤 이 아문의 개칭에 따라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로 임명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야기되었을 때 김홍집(金弘集)·김만식(金만植)과 더불어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한 결과 청나라 군대와 친군좌우영병(親軍左右營兵)이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 패퇴시킴으로써 정변을 종식시켰다.

정변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대외관계를 담당하였다. 독판 재임중 민씨척족과 친일급진개화파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도모하여 실현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새로이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부임하자 그의 친청노선(親淸路線)은 한층 굳어졌다.


1886년 4월부터 반대파의 모략이 가해지면서 차차 어려운 처지에 놓이더니 1887년 5월 부산첨사 김완수(金完洙)가 일상사채(日商私債)에 통서(統署)의 약정서를 발급하였다는 죄목으로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지내야 했다. 1894년 석방되었고, 강화부유수로 임명된 것은 그 다음해 6월이었다.

그가 등용된 것은 청일전쟁 직전으로 일본 세력의 지원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민씨척족세력이 제거된 때문이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 등용되어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경장에 간여하였고 독판교섭통상사무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7월 정부기구의 개편에 따라 외무아문대신(外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

갑오경장의 입안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는 한편,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잠식당하는 굴욕적인 모든 조약이나 조처에 순응하였다. 1896년 2월(이하 양력임) 아관파천사건이 야기되자 외무대신직에서 면직되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것은 을미사변 관련이다. 고종32년(1895) 8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에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11월에 단발령과 양력을 쓰게 하는 등 개화 정책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여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듬해 1월 지방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게 되어 김홍집 등은 피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외무대신 김윤식은 도망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 폐후고묘문(廢后告廟文, 명성황후를 폐하였음을 종묘에 고하는 글)을 지은 규장원경 이승오와 이 글을 외국공관에 통보한 김윤식을 탄핵하는 상소가 잇달아 이들은 1897년 12월 제주목에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김윤식과 이승오는 1898년 1월 11일 인천을 거쳐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하였다. 당시 제주목사 이병휘는 이들을 약 40일간 감옥에 수감했다가 2월 20일에 보석시켰다. 김윤식과 이승오는 제주성내 교동(현 관덕로)의 김응빈 집에 적소를 마련하였다.

그 후 김윤식은 김응빈의 집과 이웃해 있는 이윤성의 집을 매입하여 적소를 옮겼다가 다시 이곳 막은동(막은골) 손신성의 집을 매입하여 적소를 옮겼다. 김윤식과 이승오는 지방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귤원시회'(橘園詩會)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시회를 열어 지도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지도로 이배되었다가 1907년 7월 일진회(一進會)의 간청과 정부의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조처에 따라 10년 만에 해금되어 서울로 돌아갔다. 귀경 후 황실제도국총재(皇室制度局總裁)·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등을 맡아보았다.

1908년 정부로부터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다. 한편,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강구회(講舊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이 회가 주최가 되어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가지는 등 정치활동도 하였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국권회복활동이 활발해지자 기호학회(畿湖學會)회장, 흥사단장(興士團長)으로서 민족운동을 하였고, 교육구락부(敎育俱樂部)부장, 대동교총회(大同敎總會)총장으로 활약하였으며 대동학회(大東學會)·기호학회(畿湖學會)에 참여하였다.


1910년 8월 창덕궁에서 합방에 관하여 순종의 물음이 있었을 때 홀로 합방의 옳지 않음을 적극 주장하였으나 결국 일제의 한반도강점 후에 일제가 베풀어주는 중추원부의장의 취임과 수작(受爵)·은금(恩金)을 사퇴하였으나 후에 고종과 순종의 권유에 따라 자작 작위를 수작하였다.

그러나 1916년에는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두문불출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었을 때 위호의정(位號議定)에 있어서 일본측이 ‘전한국(前韓國)’이라는 ‘전(前)’자를 고집하자 이에 항의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1852~1932)과 연서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보냈는데,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고 작위도 박탈당하였다.


저서로는 《운양집》을 비롯하여 《임갑령고 壬甲零稿》·《천진담초 天津談草》·《음청사 陰晴史》·《속음청사 續陰晴史》 등이 있다.


1922년 1월 22일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 평구리(平丘里) 육송정(六松亭) 청송김씨(淸風金氏)의 누대(累代) 이어온 세원지지(世苑之地)에 있다. 이곳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첫 줄에 나오는 출발지이기도 하다.

제주시 일도1동에는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5년여 동안 적거했던 유허지가 있다. 현재 옛터만 남아 있다.

외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운양 김윤식은 을미사변 뒤 광무1년(1989) 제주도에 유배되어 1901년 5월 이재수의 난을 계기로 동년 6월 전라남도 지도로 이배될 때까지 제주에서만 5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사건들을 한문으로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이 음청사(陰晴史)와 속음청사(續陰晴史)이다.

운양의 제주 유배 기간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전환기였다. 그의 제주 기록에는 당시의 국내외 정세, 제주도 유배인의 생활, 부패한 관료의 행태, 과다한 부세, 제주도의 풍속, 농어업, 교유했던 제주인 등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특히 제주근대사에서 큰 사건으로 꼽히는 방성칠난과 이재수난을 몸소 체험(방성칠의 난 때에는 조천리, 시흥리로 피난을 다니기도 하였다)하면서 가감없이 적어내려간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속음청사의 1898년 6월 28일의 기록 일부를 소개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용두암 위에 앉아서 잠녀(潛女) 두 사람에게 삯을 주어 전복을 캐게 하였다. 떴다 가라앉았다 하기를 오래 하더니 전복 세 개를 캐냈다. 마을 가게에 들어가 술을 사서 회를 만들어 먹었다.

남강(南岡)이 점심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일행이 먹었다. 점심 후에 남강이 사람들에게 고깃배와 테우 두 척을 부려서 용연 밑에 정박하게 하니 이에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갔다. 양쪽 언덕의 석벽에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제명(題名)이 많이 있다.

…중략… 홍주사 종시(鍾時)의 집이 서문 밖에 있어서 여기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거기에서 저녁밥을 하여 가지고 오니 일행과 함께 뱃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안주와 과일도 나중에는 바닥이 났고 달은 이미 기울었다. 드디어 나란히 벗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운양은 본처에 아들과 손자가 있었으나 병약하여 일찍 죽었으므로, 이윤성의 집에 살 때 소실을 맞아 이듬해 아들 유문(어릴적 이름은 '제주에서 태어난 망아지'란 뜻의 영구(瀛駒)였다)을 낳았으며 해배되어 돌아갈 때 데리고 갔다.

김유문은 세상을 뜨기 직전인 1990년대말 자신이 태어난 곳을 한번 보려는 마음으로 제주에 왔지만 지리를 몰라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손자 김상수씨 증손자 김주철씨가 제주를 찾아 용두암, 사라봉, 중앙로 김윤식 적거터, 동복리, 시흥리 등 운양의 발자취가 배인 곳을 두루 찾아보았다.


1914년 9월 1일 "조선은행" 기명의 100원권이 발행되었다. 조선은행권의 도안을 보면 백원권에는 수노인 또는 대흑천상(大黑天像, 본래 불교에서 불·법·승 삼보를 옹호하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한다는 신으로서 뒤에는 복의 신으로 부엌에 모시게 되었다.)으로 이는 일본은행 최초의 구 백원권에 있었던 것이며 다른 권종에는 나이 많은 노인상을 공통적으로 게재하고 있었다. 수노인은 운양 김윤식의 초상화를 모델로 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위 초상화는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Llizabeth Keith, 1897-1956)가 지은 Old Korea 1920-1940 이라는 책에 수록 된 것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한국을 여행하던 중 김윤식이 85세 되던 해 미국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주선으로 그린 초상화다.

화가가 김윤식을 만난 것은 일부에서 친일파라고 비난을 받던 그가 이용직과 더불어 '독립청원서'를 일본 총독을 비롯한 각처에 제출하여 한국의 독립을 촉구한 죄로 2년 형을 받고 출옥한 직후이자 죽기 한 달 전이다. 김윤식은 85세의 고령에다 병중이어서 그의 손자가 대신 옥고를 치렸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동전),(한라일보 2008년 4월 30일),(http://blog.daum.net/yeunmoon)(http://cafe.daum.net/cpks)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