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을 짊어진 채 슬프고 아프게 살다 간 이덕구의 한이 서린 현장을 찾아 넋이라도 달래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이덕구 산전은 원래 봉개리 주민들이 마소를 들판에 풀어 놓으며 잠시 들르던 곳으로서 '시안모루'나 '북받친밭'이라 부르는 깊은 산중을 말한다. 이곳은 제주 4.3 당시 군부대의 대토벌을 피하며 응전했던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부대가 움막을 지으며 생활했던 곳이다.
곳곳에 움막을 지었던 흔적과 초소 자리 등이 아직까지 뚜렷하며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잔해들이 남아 있다. 북받친밭 일대에는 1948년 겨울부터 1949년 봄까지 수 백 명의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피신했다고 한다.
근년에 구성이 된 사려니숲길 주차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만큼 아쉬운 부분도 있으나 워낙 이 숲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점을 감안한다면, 늦게나마 주차 시설이 마련된 것은 다행이기도 하다.
제주시가 정한 '제주시 숨은 비경 31곳'에 포함이 되었고 지난 2009년에 이미 '아름다운 숲길 전국 대회(10회)'에서 수상을 한 바가 있다. 일찍이 에코힐링(eco-healing/자연치유)으로 정해진 사려니 숲길은 환경과 구성이 잘 맞고 타이틀 역시 이에 잘 어울린다. 또한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에 포함이 된 곳이기도 하다.
장담하건대 올 연말이 가까워지면 현수막의 내용은 다시 바뀌게 될 것이다. 2021년 12월 31일 까지로.....
실상 물찻오름을 보존하고 보호하려면 하절기에 즈음하여 일시적으로 개방하는 구성에서도 제외해야 할 뿐 아니라, 일부 인위적인 복원을 거쳐 확실한 탐방로만 다니게 한다면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매우 이상한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론과 현실 차이가 백지 한 장이 아닌 철판 두께이겠지만 진정한 복원을 원한다면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이다.
한라산 중턱의 어후오름에서 발원을 하여 물장오리와 부소오름 등을 거쳐 표선면 하천리까지 이어지는 하천(川)이다. 제주의 많은 천 중에 유로가 가장 길고 복잡하며 거리가 약 25.7km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하천이 지질상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듯이 이곳도 평소에 건천으로 있다가 집중호우나 태풍 등이 지날 당시에는 범람이 되는 계곡이다. 이런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지금은 천미천 옆으로 아치형 데크가 만들어져 많은 비가 내린 후 건너는 상황도 좋어진 상태이다.
오랜만에 찾은 사려니 숲길이기도 하지만 짧은 차이이지만 바쁘지도 않고 서두를 필요도 없는 데다, 이제 북받친밭으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를 차례가 가까워진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고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제주 4.3유적지 중 한 곳으로서 이덕구 산전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딱히 길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일부 방문객들이 다니는 때문에 조릿대 사이로 흔적이 보이며 곳곳에 리본도 매달려 있다.
초행이 아님에도 안내판을 살피면서 비로소 마음이 착잡해졌는데 현장 상황을 만나기 위한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더 이상의 의미가 깃든 곳이기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느리게 안내문의 내용을 읽어보고 본격적으로 산전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따랐다
경사가 낮은 숲길을 따라가는 동안 바지 깃에 와닿는 소리가 속도를 더해가는 것은 아마도 마음이 급한 때문이었으리라.
봄의 중심에서 성장의 진행형을 이어가는 식물들은 중심을 잃은 나무들을 가리기라도 하듯 푸름으로 반전을 시키는 모습이었다. 고요와 적막만이 맴도는 깊은 숲 안의 산전에는 이따금씩 까마귀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장 주변을 발견하고 잠시 우두커니 선 채로 바라봤다. 가까이에 다가갈 생각보다는 멍하니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쉬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덕구 산전.
4.3 당시 군인들에게 쫓긴 주민들의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며 은신처로 선택을 했던 장소이고 그 흔적이다. 이덕구 역시 한때 부대원들과 잠시 주둔을 했던 때문에 이덕구 산전(山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옆에는 깨어진 그릇과 주걱도 흔적으로 남아 있다.
슬프고 참담한 현장이다.
비극의 역사와 아픈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터전이다.
김경훈 님의 시 중 이덕구 산전에 관한 내용을 이전에 옮긴 적이 있다.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
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
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
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
까마귀 소리 사이로
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
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
돌틈새 나무뿌리 사이로
복수초 그 끓는 피가
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
우리는 싸움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이덕구와 부대원들...
지은 죄 없고 피난을 해야 하는 이유조차 몰랐던 주민들.....
그들을 기리고 넋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마음을 따랐고 위로를 건넸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네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ㅡ병으로 작고한 정군칠 시인이 詩 중 '이덕구 산전'ㅡ
그는 조천읍 신촌리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지방 유지였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1943년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으며 광복과 함께 소위로 제대하였다.
1948년 김달삼이 남로당에 참석 차 간 뒤 제주도 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그의 큰형인 이호구는 해방 후 고향에 신촌(조천)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하 일부 내용은 자료 발췌를 통하여 옮겼음)
더 이상 무장대에 남아있으면 헛된 죽음을 맞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2~3명씩 뿔뿔이 흩어져 마을로 내려가 후일을 도모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무장대를 회유하기 위한 선무공작이 병행되던 시점이었기에 나름대로 무장대의 희생을 줄여보겠다는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원들은 이덕구의 이 같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대원들은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일본도를 휘둘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절벽 아래로 몸은 던지는 등 죽음을 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조천중 교사였던 이덕구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와 시대를 잘못 짊어진 것이 죄일 뿐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소설가 현기영님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이덕구는 김달삼에 이은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사람이다. 1949년 6월 7일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다음 날인 8일 관덕정 광장 십자형틀에 묶인 그의 시체가 전시되었다 한다. 도민들은 침묵으로 이를 지켜보았고 실질적으로 4.3의 끝이 되었다.
그러나 방화사건의 오명으로 인하여 김익렬 중령은 교체되고 강경 진압이 이루어지게 된다. 만약에 평화적 해결방안이 성공했다면 제주도 도민들 전체가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바위 틈새의 척박한 곳을 터전으로 삼아 세상을 만난 가녀린 소나무를 한동안 바위에 걸터 앉은 채 바라보며 그렇게 주문을 하였다.
꼭!
못 견디게 아프고 힘들지라도 반드시 살아나라.
바람이 지나가듯 아픔도 지나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