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고고역사학계 놀라게 했던.. 고내리 탐라시대유물발굴현장(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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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고고역사학계 놀라게 했던.. 고내리 탐라시대유물발굴현장(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0.03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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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리식 토기'로 불리는 탐라후기의 표지적 유물, 고내리식 토기는 제주섬의 독자 브랜드인 셈

고내리 탐라시대유물발굴현장(멸실)

 

위치 ; 애월읍 고내리 650의 4번지 일대. 고내리 마을 동쪽 우회도로 밑. 고내봉 기슭에서 해안가로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 중심 부근
시대 ; 탐라국후기(한반도 통일신라)(8~9세기)
유형 ; 선사주거유적

고내리_선사유물
고내리_선사유적발굴

 


마을 우회도로 건설중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제주대학교박물관(관장 이청규)에 의해 발굴이 시작된 곳이다. 1994년 9월부터 1995년초까지 발굴 결과 드러난 현장은 고고역사학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4차선 도로가 관통하는 약 2천평의 면적에 대한 발굴을 통해 무려 1백17개의 크고 작은 구덩이가 다량으로 밀집돼 나타난 것이다. 구덩이는 대부분 직경이 2~3m 이상 되는 대형과 1~1.5m 내외의 소형으로 다양했다.


1500년전(탐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토기․탄화된 곡식 등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녹청자․청자, 조선전기의 것으로 보이는 명문(高內村)기와를 비롯하여 납석․곡옥․가락바퀴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5년 6월에 발굴 조사를 마치고 도로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지금은 확장된 일주도로가 그 위를 덮어 그 흔적을 볼 수 없으나 주변 경작지에는 패각류들이 하얗게 깔려 남아 있다.


당시 고대인들은 이곳에서 나오는 멧돼지, 소 등 다양한 동물뼈로 보아 수렵과 어로 및 원시적 형태의 농경생활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일부는 흙을 채취하고 토기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등 분업화된 사회구조와 대량생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구덩이 유구의 배치 양상 뿐 아니라 규격화되고 제품화된 성격이 강한 고내리식 토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도의 전문화된 기술로 생산된 토기는 교역에 의하든 아니면 일상생활에 따라 자연스레 이동하든 섬 전역으로 확산됐다.

적갈색의 고내리식토기는 도내에 20여군데가 넘게 확인되고 있다. 1500년전 제주섬은 고내리에서 생산된 토기가 일상생활을 지배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을 하면 고내리식 토기는 제주섬의 독자 브랜드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구덩이들이 확인되었다. 4차선 도로가 관통하는 약 2천평의 면적에 대한 발굴을 통해 무려 1백17개의 크고 작은 구덩이가 다량으로 밀집돼 나타난 것이다. 직경 2~3m이상인 대형과 1~1.5m 내외의 소형이 대부분이다.

대형 구덩이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소형 구덩이가 밀집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부는 토기생산과 관련된 야외요지, 흙을 파냈던 구덩이, 토기 제작 후 파편과 불에 탄 흙을 폐기한 구덩이, 곡물을 저장했던 구덩이 등으로 추정됐다.

이곳에서는 동체 중앙부가 살짝 부른 원통형에 가까운 적갈색 심발형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바로 '고내리식 토기'로 불리는 탐라후기의 표지적 유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진 것이다.


이곳 고내리와 매우 가까운 곳곽지리식 토기는 기원 2세기를 중심년대로 하는 탐라국 형성기 대표 유물로서 탐라전기(A.D. 1~500)를 편년으로 한다. 반면에 고내리식 토기의 중심년대는 8세기대이다. 이는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회색도기가 공반 출토되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는 바로 탐라국이 역사의 전면에 본격 등장 전성기로 접어들던 때다. 탐라국이 국내외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백제 문주왕 2년 476년이다. 물론 탐라국의 주변지역과의 교류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어쨌든 탐라국은 이 시기 이후 수십차례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고내리 유적은 바로 이러한 탐라후기 제주섬의 위계화된 사회체제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현장인 것이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이처럼 구덩이 유구만이 밀집돼서 나타난 토기생산유적은 조사된 바 없다. 그만큼 유적의 중요성과 희소가치를 보여준다.


해발 2백미터의 고내봉 일대는 수성화산(水成火山) 활동의 산물인 응회암지구로 오래전에 형성된 고(古)토양이 발달해 있다. 고내봉에서 해안가 방향으로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토양이 노출되어 있는 응회암지구이다. 화산활동에 의한 현무암 대신 풍화․퇴적작용에 의해 생성된 이곳 양질의 점토가 고내리식 토기 생산기지 역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 유적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도로 개설을 이유로 부랴부랴 긴급구제발굴을 하고 덮어버렸다. 이 유적은 현재 4차선 도로 아래 깔린 채 잊혀진 존재가 돼 버렸다. 출토 유구 등 현장을 보여주는 안내도면 하나 설치되지 않은 현실이다. 고고학자나 발굴전문가들은 이 점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한라일보 2002년 7월 17일, 31일)


고내리식 토기는 한국 본토의 마지막 무문 토기 전통의 산화염 소성 토기이다. 고내리식 토기는 탐라 전기(200~500년)의 곽지리식 토기와 비교해 볼 때 차이가 심하다.


먼저 그릇 단면을 보면, 태토의 조직이 치밀한 것이 확인된다. 성형 과정에서 특히 곽지리식 토기와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점은 바닥을 만들어 동체와 접합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곽지리식 토기와는 달리, 그릇 입술면은 회전하면서 마치 대칼 같은 것을 이용하여 잘라낸 것처럼 매끈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크기에 거의 상관없이 두께가 0.8~1㎝ 정도로 균일하다.


고내리식 토기는 곽지리식 토기와 똑같이 산화염 소성으로 구워졌다. 그러나 성형 과정과 형태 등에 보이는 여러 기술적 속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기술적 향상에 따른 것이다.


고내리식 적갈색 토기의 기형은 더욱 단순하다. 90% 이상이 입 지름과 바닥 지름이 같으며, 동체부 한 가운데가 살짝 부른 원통형에 가까운 심발형이다. 밑 지름 대 입 지름의 비율이 크기에 관계없이 1:1 정도로 거의 균일하다.


고내리식 토기는 납작 바닥과 짧게 외반된 구연부가 특징이다. 아가리의 외반도가 10°정도 밖으로 벌어져 있어 보통 30°가 넘었던 곽지리식 토기와는 대조를 이룬다. 목의 길이도 높이의 1/20 정도로 곽지리식 토기보다 매우 짧다. 반면에 높이에 비해 바닥과 입의 지름 비율은 상대적으로 커져서 안정감을 준다.


고내리식 토기의 기종은 매우 단순하여 대소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내리식 토기는 규격화․제품화된 성격이 강하여 전문적인 생산 체제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내리식 토기는 남한 지방에 회색 도기가 대량 보급될 무렵 제주도에서 성행했던 토기이다. 기본 제작 방법은 회색 도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소성 방식에서는 차이가 나는 순수 제주도산이다. 한반도의 마지막 산화 염소성의 적갈색 토기의 발전 형태와 기법을 연구할 수 있는 토기 자료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강창화 집필)


고내리유적에서 지금의 물허벅과 같은 형태의 회색도기가 확인되는데, 회색도기의 사용은 그리 보편화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기록물에 의하면 도기, 도자기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과 같은 옹기의 생산은 그 이후로 여겨진다.<한라일보 020731 고재원․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연구원․고고학>
《작성 1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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