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948년 10월 이후 서북청년단 20명 근무.. 김녕리 김녕지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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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948년 10월 이후 서북청년단 20명 근무.. 김녕리 김녕지서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0.06 0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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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동안에는 동복리, 월정리, 행원리, 한동리, 송당리, 덕천리를 관할하던 경찰관서이다.

김녕리 김녕지서터

 

위치 ; 김녕리 3934번지
김녕지서터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관청건물터

김녕리_김녕지서터


해방 후 1945년 10월 21일 국립경찰이 창설됨에 따라 김녕지서로 재편된 이곳에는 4․3사건 초기부터 서북청년단이 진을 쳐서 김녕리 및 인근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김녕지서는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제주도내 11개 지서를 습격했을 때 그 중 한 곳으로 당시 경찰관 2명이 부상당했으며, 4․3사건 동안에는 동복리, 월정리, 행원리, 한동리, 송당리, 덕천리를 관할하던 경찰관서이다.

이와 같이 구좌 서부지역 토벌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무장대의 공격도 자주 받은 편이었다. 1949년에는 조속한 4․3 진압을 위해 모슬포와 성산포에 경찰서가 신설되면서 김녕지서는 성산포경찰서에 소속되기도 했다.

당시 김녕지서에는 지서장인 한○○, 애월 출신인 백 경사, 서북청년단 출신 김용걸 등이 근무하고 있었다. 8월 31일에는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1시간 이상 교전을 벌였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특히 1948년 10월 이후에는 서북청년단 20명이 근무하며 인근 주민들을 고문, 학살하는 등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

저승사자로 악명을 날렸던 김용걸은 말을 타고 다니며 회초리를 마구 휘둘러 파직되었으나 다시 경찰에 복귀하여 함덕지서 고문치사 사건을 일으킨 후 재차 파면되기도 했다. 반면 제주 출신 한○○ 주임은 주민의 억울한 희생을 줄이려 애를 썼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1948년 12월에는 9연대가 철수하자 동쪽 마을인 월정리 구좌중앙국민학교에 2연대2대대11중대가 주둔하게 되었는데 11중대는 서청특별중대였다. 이 서청특별중대가 김녕지서와 연계, 합동토벌로 인근 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러 가장 악명이 높았다.


당시 김녕지서에는 관할 구역에서 붙잡혀 온 무장대와 그 혐의자, 도피자 가족 등이 구금되었다. 이 과정에서 죄없는 주민들이 항변 한 번 못해 보고 숱하게 쓰러져 갔다.

특히 김녕으로 소개되어 온 동복리, 덕천리 주민들의 목숨은 지서 경찰을 포함한 토벌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동복리 출신 할머니 한 분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사지로 끌려가면서 “제발 철창이 아닌 총으로 쏘아 죽여 달라”고 통한의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이들이 주로 희생당한 장소는 김녕공회당 앞밭과 김녕농협 앞밭이었다.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녕지서 경찰들은 1948년 11월 5일 잡화상을 운영하던 원○○(30세)을 지서로 끌고 가 구타 등 심한 고문 끝에 치사시킨 후 시신을 길거리에 유기했으며 상점의 물건들을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임○○마저 지서로 연행해 마구 구타하는 등 잔학행위를 일삼았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가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고인의 원한을 풀어주길 바라며 연평리 출신 김○○ 경찰을 소환하여 대질시켜 달라는 요망사항을 전할 정도로 원통한 심정을 토로했다.(김녕리 83~85쪽)


당시 지서 건물은 기와집이었으나 다른 곳으로 옮겼고, 지금은 상가(조광철물) 건물이 들어섰다.(4․3 유적Ⅰ 485쪽)
《작성 1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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