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해변에 있는 한 민가 뒤뜰 조그만 궤.. 김녕리 봉지동피난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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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해변에 있는 한 민가 뒤뜰 조그만 궤.. 김녕리 봉지동피난동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0.08 0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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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부녀자들 50명 가량이 숨었었다는 굴이다

김녕리 봉지동피난동굴
 

위치 ; 김녕리 1307번지(김녕로1길 70번지) 봉지동 민가 뒤뜰
유형 ; 동굴(피난생활터)

김녕리_봉지동피난동굴 입구
김녕리_봉지동피난동굴 안에서.

 


김녕리는 4․3 당시 김녕지서가 있어서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들이 집중적으로 주둔하여 구좌면 서북부 지역의‘토벌근거지’가 됨으로써 구좌면 관내의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다.

그래서 무장대로부터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남자들은 2개 중대로 민보단을 조직하여 토벌대에 협조했다. 날쌔고 젊은 청년들 30명으로 특공대가 꾸려져 군경의 토벌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 이후 김녕리에는 여성들의 수난도 그칠 새가 없었다. 김녕지서에 배속된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과 월정리 주둔 서청 특별중대의 민간인 탄압과 여성들에 대한 희롱과 겁탈은 지역 주민과 인근 지역에서 소개되어 살던 젊은 여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특히 김녕으로 소개되어 온 동복리, 덕천리 주민들의 목숨은 이들이 쥐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이 토벌대에 붙잡히면 비천한 살림에 온갖 뇌물을 바쳐야 했고 심지어는 젊은 여자를 토벌대와 결혼시켜 가족들의 목숨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4․3 유적Ⅰ 479, 481쪽)


이북 출신 경찰관 노(盧) 순경은 한 처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김용식(金龍植, 20)에게 시집을 갔다. 앙심을 품은 노 순경은 1949년 3월 22일 중산간 순찰 때 마침 민보단원이던 김용식과 같은 조에 편성되자 그를 총살했다.

토벌대는 또 부녀자 겁탈을 밥먹듯 했다. 한 주민은 이를 ‘처녀토벌’이라고 말했다. 주로 소개민이 당했지만 김녕리 주민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만 되면 부녀자들은 숨기에 바빴다.


김녕리는 구좌 서부 지역의 토벌기지였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민보단이나 특공대로 토벌대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50여 명이 희생되었다.(김녕리 90쪽)


김녕리의 해변에 있는 한 민가 뒤뜰에 조그만 궤가 있다. 주민 중에서 주로 부녀자들 50명 가량이 숨었었다는 굴이다.(제민일보 1998년 3월 20일) 굴의 넓이는 10평 정도 되지만 구석으로 갈수록 낮아져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북쪽으로 1.2m 정도 높이의 입구가 나 있고 큰 돌덩이들이 몇 개 흩어져 있으며 들어가 보면 왼쪽(동쪽)이 조금 넓은 쪽인데 여기에 불을 피웠던 오래된 재가 둥글게 남아 있다.
《작성 1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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