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큰 암반 있어 명당 소리 들어..조천리 김응전 가옥(김순환 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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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큰 암반 있어 명당 소리 들어..조천리 김응전 가옥(김순환 기와집)
  • 고영철(제무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4.18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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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 2건물은 원래는 초가였으나 지금은 지붕을 바꾸었다.

조천리 김응전가옥(김순환기와집)

 

제주특별자치도 향토유형유산 제21호(2016년 7월 11일 지정)

위치 ; 조천읍 조천리 2518번지(조천9길24-1)
유형 ; 민가(기와집)
시대 ; 조선시대(1903년 추정)

조천리_김순환와가 안거리
조천리_김순환와가

 

조천리 김순환(金淳煥)씨 기와집은 주위 지형(도로)보다 낮은 곳에 돌담을 두르고 건물이 들어섰다. 대지가 약 1,700㎡로 매우 넓어 북서쪽 부분은 우영팟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이며, 마당은 안팎거리 사이가 12m나 되어 일반적인 마당의 2배에 가깝다. 마당을 둘러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잇돌을 박았다. 부분적으로 시멘트로 보완한 곳이 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김순환(전 제주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작고)씨 부인의 기억에 따르면 광무 7년 혹은 광무 9년이라는 상량문을 보았었다고 하니 1903년 또는 1905년에 지은 집이다. 창건주는 김순환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응전(金膺銓)이다.

김응전은 순조33년(1833)∼1915년. 본관은 김해(金海). 고종14년(1877) 정시(庭試)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입격하고, 이후 전시(殿試) 무과에 급제하였다. 고종15년(1878) 명월만호, 고종18년(1881) 해미현감(海美縣監). 광무6년(1902)에는 종2품으로 품계가 올랐다.

광무2년(1898) 음력 8월 방성칠의 변란이 평정되자 제주에 유배와서 김응빈의 집에 적거중인 김윤식(金允植)과 시작(詩作) 활동을 하여 동생 김응빈 등과 함께 귤원시회(橘園詩會)를 조직하였으며, 제주의 한시(漢詩)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를 하였다.

안거리, 밖거리, 동쪽 이문거리, 서쪽 별채까지 囗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이문거리 북쪽으로도 별채가 있어 건물은 모두 5채가 한 번지 안에 있다. 오래 전에는 북서쪽 모퉁이에도 별채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의 주춧돌들이 보존되어 있다. 별채 2건물은 원래는 초가였으나 지금은 지붕을 바꾸었다.

북쪽에 남향으로 앉은 안거리는 정면 3칸이며 기둥 부분에 돌벽을 붙였다. 면적은 약 96㎡이다. 재목은 주로 밤나무를 이용하였다. 못을 쓰지 않고 지었다고 하는데 추녀 끝의 아래를 보면 사괘맞춤으로 결구한 부분이 보인다. 퇴에는 유리문을 달았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렸으며 기와의 틈은 회로 마감하였다. 안거리의 안뒤는 공간이 넓고 북쪽 울타리에 붙여 빌레가 남아 있다.

정면 마당과의 경계에는 잘 다듬은 돌로 만든 3단 잇돌이 있다. 동쪽 벽을 확장하여 주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쪽 빈 공간에는 눌굽을 마련하였던 곳으로 보이는데 구들돌, 주춧돌, 옛기와들이 쌓여 있다.


밖거리는 4칸 약 84㎡이며, 안거리보다 좀 더 길쭉한 모양이다. 밖거리에도 유리문을 달았는데 동쪽에는 창이 있다. 밖거리 뒤에도 동쪽과 서쪽을 돌담으로 막아 안뒤를 만들었는데 그 안에 커다란 소철이 자라고 있다. 밖거리의 서쪽에 통시가 있었다. 잇돌이 1단으로 되어 있다.

동쪽 별채는 장남 방과 쇠막이었다. 서쪽 별채는 고팡과 정지로 사용했으며 ᄀᆞ래, 도고리 등의 도구가 비치되어 있었던 곳이다. 1940~1950년대에는 여기서 물을 데워 목욕을 하기도 했다.


마당은 평평하지만 안거리 안뒤나 밖거리 안뒤는 암반으로 이어진다. 이 큰 암반이 있어서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한 가지 단점은 큰비가 내리면 마당에 무릎까지 물이 차곤 했으나 시집와서 평생 이 집에 살고 계신 할머니의 정성어린 관리로 지금은 서쪽으로 다 빠져 나가게 되었다.


울타리 서쪽에는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오래 전에는 좁은 나무문이 있었다. 문밖에는 김순환의 할머니가 개인 재산을 들여 굴정(掘井)한 우물이 있었다. 김순환의 할머니는 사람이 남에게 꼭 주어야 할 것 3가지로 물, 불, 길을 들었다고 김순환의 부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이 모두 이 우물을 이용했지만 1970년 전후에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메워 버렸다. 마을 유지들(건립자 대표 이창수)이 세워 주었던 우물에 대한 공덕비는 우물이 매립된 후 김순환씨가 시멘트 밑에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런 철학적 신념을 이어받아 집 주위 가로등도 개인이 설치했다고 한다.
최근에 우물을 복원하고 비석도 다시 꺼내어 세웠다.

《작성 131020, 보완 1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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