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조선시대 불상 목조여래좌상 봉안.. 상귀리 월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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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조선시대 불상 목조여래좌상 봉안.. 상귀리 월영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6.09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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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물동 인근은 조선시대 이래로 월령사(月瀛寺)가 자리 잡고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상귀리 월영사

 

상귀리 월령사(月瀛寺)
위치 ; 애월읍 상귀리 329번지[하귀동남2길 40-16]
유형 ; 불교 사찰
시대 ; 조선 후기(17~18세기)

상귀리_월영사 사천왕문
상귀리_월영사대웅전

 

월영사는 애월읍 상귀리 파군봉 남쪽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이다. 파군봉(破軍峰)을 끼고 흐르는 병풍천 지경에는 예로부터 ‘부처물’이라는 용천수가 샘솟는 부처물동이 위치한다. 부처물동 인근은 조선시대 이래로 월령사(月瀛寺)가 자리 잡고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주위의 지형은 비교적 평탄하나 부처물이 있는 곳에는 하천과 산이 있어 다소 비탈을 이룬다. 현재 부처물 주위로는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부처물의 동쪽, 남쪽, 북쪽에서는 기와편이나 도자기편이 드물게 발견되고 있다.


이곳에 전해오는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갑자기 사찰이 무너지면서 주지 스님이 쓰던 대야가 부처물에 묻혔는데 그 후 비가 와서 물이 넘칠 때면 인근에 대야 우는 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옛 사찰에 모셔져 있던 불상이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월령사 외곽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월령사가 폐사되고 이후 다시 월령사가 세워진 것은 1930년대이다. 기록에는 월령사가 1936년 위봉사 상귀리포교당으로 계출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월령사는 1943년 포교규칙 제9조에 의해 본산을 위봉사에서 백양사로 이전 변경하였다.


1945년경에는 사명을 월령사에서 귀이사(貴二寺)로 개칭하였다. 그 당시 주지는 한병욱 스님으로 1945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에 참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1948년 제주 4·3 사건의 발발로 귀이사는 토벌대에 의해 불상을 비롯해 사찰 안에 있던 모든 불화와 불기가 사찰 전각과 함께 전소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그 후 설우스님이 1961년에(제주불교신문) 또는 지학스님이 1962년에(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귀이사 바로 옆 부지인 상귀리 329번지[하귀동남2길40-16]에 현재의 월영사를 창건하면서 부처님 법을 이어오게 됐다.

당시 설우스님은 부처님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1962년 칠성각 와가를 28평 규모로 신축하고 1983년에는 1322평 일대를 종교용지로 지목 변경하면서 1987년(1988년) 85평 규모의 대웅전을 비롯한 불사를 연차적으로 추진, 1988년까지 대작불사가 이뤄지게 됐다.


이후 1990년 50평과 22평의 요사채 2동을 신축했고, 1994년 중량 2100관 규모의 웅장한 범종 불사, 1996년 노천단 산신석상 봉안, 1998년 단청불사 등 지속적인 불사로 부처님 도량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제주불교신문) 2006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법당 내부에는 조선시대 불상인 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신도로부터 기증받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청동여래좌상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오성)


2009년에는 36.3㎡(11평) 규모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계 팔작지붕 구조의 전통목조양식으로 사천왕문이 건립됐다. 제석천을 섬기고 불법을 수호하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봉안되었다.(제주투데이 091106)


월영사 입구에는 일주문을 대신하여 소종이 걸려 있는데 일본식 양식을 따른 종으로 조성연대가 불기2989년(1962)으로 음각되어 있다.(※일반적으로 불기는 기원전544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서기1962년이면 불기2506년이 되는데 여기 나타난 불기의 기준은 무엇인지 필자는 알 수 없다.)


대웅전 내 칠성탱화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왼쪽의 일광보살, 오른쪽의 월광보살이 시립하고 있으며, 칠성여래를 비롯한 여러 성중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대칭형 구조로 불기2991년(1964)에 대웅전의 탱화들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화기에는 조성연대와 금어, 시주자가 나와 있다.(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치성광여래란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그 중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이다. 칠성을 불교의 호법선신(護法善身)으로 수용하고 이를 의인화한 것이다. 칠성에 대한 신앙적 기능이 조선 초기부터 강화되면서 독립된 신앙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이밖에 북두칠성은 칠여래(七如來), 해는 일광변조소재보살(日光遍照消災菩薩), 달은 월광변조소재보살(月光遍照消災菩薩)로 바꾸어 부른다. 북극성은 그 빛이 밤하늘의 별 중 가장 밝아 치성광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치성광을 내뿜어 해와 달, 그리고 별과 그 별이 머무는 자리 등 빛이 있는 모든 곳을 다스린다. 불교가 우리나라 재래의 민간신앙을 흡수한 예로, 다른 나라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국가지식포털, 네이버 백과사전)


칠성신앙의 대상은 칠여래(七如來)의 화현(化現)인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칠성신이다. 따라서 칠성탱화를 그릴 때에는 칠여래와 함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반드시 묘사한다.(박물관 포털e뮤지엄)


지장탱도 있는데 지장보살은 원래 인도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한 보살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 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분이다. 화면을 상하 두 개면으로 분할하여 화면의 위쪽 중심에는 반가좌한 자세의 지장보살이 민머리를 하고 한 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좌우에는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좌우대칭형 그림으로 지장보살의 좌우로 명부의 세계를 심판하는 시왕(十王)이 문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보살상과 동자 등도 배치되어 있다. 불기2991년(1964)에 만들어진 것이다.


종각은 앞과 옆면 각 1칸의 2층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사모지붕으로 1층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으며, 1994년에 지어졌다. 내에는 건물 신축과 함께 봉안한 범종이 있다.(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대웅전 앞에는 보현보살석상과 문수보살석상을, 뒤에는 1998년 산신이 호랑이 등에 앉아 왼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의 산신상을 세웠다.
《작성 1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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