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한..토산2리 향사터(4・3학살전감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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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한..토산2리 향사터(4・3학살전감금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9.14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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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포한 군인 한 사나이의 명령에 따라 무지하게 총으로 폭살하고, 창으로 도륙..

토산2리 향사터(4・3학살전감금터)

위치 ; 토산2리 537-1번지. 토산2리사무소 서쪽 충혼비 있는 곳의 북쪽 밭
유형 ; 학살터
시대 ; 대한민국

토산2리_향사터

 

토산리는 4·3당시 토산오름을 경계로 웃토산(1구)과 알토산(2구)으로 행정이 구분되어 있었다.

1948년 12월 14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 2대대 표선 임시주둔 중대는 알토산으로 소개 온 웃토산 주민들과 알토산 주민들을 모두 향사(공회당)에 집합시킨 후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들과 일부 젊은 여자들을 결박하여 경비대의 임시수용소인 표선초등학교(한라일보에는 구표선면사무소라고 기록)로 끌고 가 수용시킨 후 17, 18일 양일간에 표선백사장에서 남자들을 총살하고, 27일에는 남아 있던 여자들을 집단총살하였다.


주민들은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에 157명을 신고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또한 1987년 ‘6월항쟁’ 이후 토산리 주민들은 ‘4·3사건 실상기’를 작성하여 정부에 진정하였다. 이 진정서에 마을의 한(恨)을 여섯 가지로 지적하며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향사 옛터는 잡목이 자라 과거의 형태와 달라졌으나 당시 울타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김양학(2007년 65세)씨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4·3사건 실상기는 다음과 같다.


〈토산리 마을은 제주도 동남단에 위치한 촌락으로서 2백여 가구가 농업을 생업으로 하여 살아가면서 4·3사건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 졸업생이 몇 안 되어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철부지하고 순박한 향민이었습니다.

경찰에서 보초를 서라면 보초를 서고 북쪽에서 총소리나 고함소리가 나면 남으로 뛰고 남쪽에서 총소리가 나면 북쪽으로 뛰면서 동분서주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포에 떨면서 살고 죽는 것이 촌각에 달린 것 같은 순간순간을 보내던 서기 1948년 음력 11월 12일 중산촌 토산1리에 거주하는 리민은 바닷가에 위치한 토산2리로 전부 철거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일제히 철거를 해서 오막살이나 소 외양간 등 닥치는 대로 빌려주고 빌리고 해서 1, 2리가 순식간에 2개 마을이 1개 마을로 형성되어 세상을 원망하고 한숨만 짓던 서기 1948년 12월14일, 오후 5시경 표선에 주둔했던 제9연대와 부수대원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리민들을 향사에 집합시키고, 그중 18세 이상 40세까지 분리하여 벳줄로 포승하고 표선으로 끌고가서 죄의 유무도 가리지 않고 광포한 군인 한 사나이의 명령에 따라 무지하게 총으로 폭살하고, 창으로 도륙하였으니 표선백사장은 피바다가 되고 진통의 울음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면서 우리 마을의 비극은 시작되고, 우리 청장년 모두의 죽음은 한에 한을 이으면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청장년이 모조리 몰살당한 이 고장의 참혹상과 가공할 운명 속에서 죽음의 아픔보다 더한 아픔을 겪어야 했던 노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 남편을 잃은 홀어머니, 유복자부터 강보에 싸인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이, 불쌍하고 가련한 생명들이 집없고 쌀도 없다시피한 폐허의 땅 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그 때의 실상을 글로써 이루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고 한숨과 눈물마저 메말라버린 노부모에게 모진 생명을 버리지 못하고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면 강보에 쌓인 어린 자식이나 손자에게 몸과 생애를 걸어 70노구에도 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끝없는 한숨을 쉬어야 했으니, 이 기구한 운명을 걸고 죽는 순간까지 살아야 했던 우리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한이 죽은 자 보다 더 고되고 아픈 첫 번째 한이요.


하늘과 같은 남편을 뜻밖에 잃고 뼈를 깎는 아픔 속에 노부모를 모시고 어린 자식을 뙤약볕이 내리 쬐이는 밭머리에 눕히고 김을 매면서 심장이 멈추는 듯한 울음소리를 듣고 피를 토하는 아픔을 참아야 했던 우리 어머님들의 삶이 두 번째 한이요.


재롱을 부리고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학교에 가고 뛰어놀며 정상적인 성장을 해야 할 10대 소년이 소를 몰아 땀을 흘리고 몸과 마음을 떨면서 밭을 갈아야 하는 엄청난 고행의 농군이 되고, 배움의 길을 잃거나 정상교육을 받지 못하여 전 생애의 울분을 참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우리들이 안고 있는 세 번째의 한이요.


어느 땅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하듯이 사람없고 힘없어 가난했으므로 주위에서의 멸시와 수모, 그리고 갖은 치욕을 한없이 받아왔던 것이 네 번째의 한이요.


그곳 백사장을 먼 곳에서만 보아도 몸서리치고, 우리 부모형제, 동네 삼촌이 참혹하게 갔던 곳으로 천륜의 아픔을 뼈저리게 삼키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의 한이요.


젊은 한 세대의 죽음으로 인하여 후 세대가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않아 가문의 유지와 지역발전에도 인적자원이 크게 모자라는 것이 여섯 번째의 한입니다.


2백여 가구에 1백57여 명의 운명을 죽음의 소굴로 몰아 넣은 이 사건에 대해 만시지탄이나 이제라도 정부당국은 거도적으로 제주도4·3사건 진상조사를 철저히 하여 정치적, 인도적 양심과 법적 차원에서 최선의 조치를 다해 주시기를 몰살 당한 유가족 연명으로 강력히 호소하는 바입니다.(87년 여름. 토산리민 공동작성)〉(한라일보 070904)


◦위 사건 관련 증언
4․3사건 때 남편이 표선으로 끌려갔다. 나는 당시 26살이었는데 물애기를 데리고 있어서 밥을 하면 시아버지가 남편에게 아침에 밥을 가져가고 점심에도 밥을 가져갔다. 저녁 밥을 먹으면 돌아오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잡혀 있던 누구 한 사람이 겁을 먹었는지 도망쳤다고 한다. 토벌대와 함께 그를 쫓아갔던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간 그 사람에게 창질을 했는데 오히려 도망치던 사람이 창을 뺏어서 쫓아오던 사람을 찔러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 날 97명이 한꺼번에 학살되었다고 한다.(토산2리 거주 92세 고○○ 140907 대화)
《작성 1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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