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영천사의 시초는 봉주사.. 토산1리 영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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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영천사의 시초는 봉주사.. 토산1리 영천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9.19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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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2월 23일에 4칸 규모의 초가 대웅전과 3칸의 초가 객실 건립 창건

토산1리 영천사

 

위치 ; 표선면 토산1리 1247번지(중산간동로5587-90)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불교 사찰

토산1리_영천사(디서문).

 

토산1리_영천사대웅보전

 

토산봉 남쪽에는 고려시대 사찰 터로 추정되는 속칭 절레왓가름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ᄂᆞ단새미가 흐르고 있다. 절레왓(절려왓) 동쪽에 영천사가 있다.


영천사의 시초는 봉주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주사는 김석윤(김종화) 승려가 월정사를 창건한 후 뒤이어 세운 사찰로써 1934년 2월 23일에 4칸 규모의 초가 대웅전과 3칸의 초가 객실을 건립하여 창건했다.

1936년 10월 5일에 위봉사 표선포교소로 등록했으며, 1943년 6월 8일에는 포교규칙 제 9조에 의하여 백양사포교소로 변경되었다.

1942년 6월 9일부터 강을심씨가 봉주사를 인수받아 운영해오다가,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봉주사도 12월 12일에 마을 주민과 함께 토산2리로 소개되면서 사찰이 철거되었다.

소개 당시 봉주사는 토벌대에 의해 법당과 객실 등 건물 일체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불상과 탱화는 소개 전 인근 대나무 밭에 움막을 만들어 그곳에 숨겨두었으나 대부분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전해져 오는 것은 없다.


봉주사가 재건되기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49년 5월 18일, 4간의 법당과 초가 객실이 새로 건축되었으며 그후 1966년에 재건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사명을 봉림사로 개명하였다.

현재의 영천사로 사명이 다시 개명된 것은 1967년이며, 1969년에 이어 두 차례의 대웅전 중축불사를 진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0년 표선면 토산리 영천사에서 동산문도회 문도 승려를 비롯해 도내 대덕 승려와 불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동산 승려 치사리 3과와 불사리 1과를 봉안하는 사리탑 제막식이 봉행됐다.

현재 영천사의 주지 승려인 수철 승려는 제주항일의병장이기도 했던 창건주 김석윤 승려의 뜻을 살려 사찰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나아가 지역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찰운영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향토문화대전)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는 경사 지형인데 앞에서부터 액자에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 연못을 건너는 나무 다리인 세심교, 弘華樓, 大雄寶殿 차례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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