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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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53)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11.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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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아리랑의 시기적 분류에 대한 연구 - 2(제25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스물 다섯번째 주제는 아리랑의 시기적 분류에 대한 연구'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Ⅲ. 신민요 아리랑의 출현

한국 민요사에는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독특한 형태의 노래가 유행하였다. 기존에 불리던 전통적인 민요와 다르다는 측면에서 새롭다고 하여 신민요(新民謠)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대중에게 친숙한 전통 민요를 시대적 상황에 맞게 응용한 새로운 형태의 노래가 등장한 것이다.

신민요의 시작을 알린 것은 1926년에 만들어진 영화주제가 <아리랑>이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비교적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형태의 신민요가 대거 등장하여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본격적인 노래 명칭으로서의 <신아리랑>이 나타난 것은 1930년 6월이다.

 

 

「조선민요 아리랑」에는 <신(新)아리랑>과 더불어 <신작(新作) 아리랑>⋅<별조(別調) 아리랑>⋅<아리랑 타령> 등이 수록되었고, 다음 달인 7월에도 가사 내용은 다르지만 <신아리랑>이라는 곡명이 나타나고 있다.

대중적인 인기몰이를 바탕으로 유성기 음반으로도 제작되었는데 <신아리랑>을 비롯한 <최신 아리랑>⋅<마즈막 아리랑>⋅<아리랑 눈물고개>⋅<그리운 아리랑>⋅<봄맞이아리랑>⋅<그리운 아리랑> 등 수많은 곡들이 발매되었다. 특히 <신아리랑>은 하나의 노래 곡목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으며, 각기 다른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신민요가 쇠퇴하면서 아리랑도 대중적 인기가 약해졌고, 점차적으로 현대적인 대중가요라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아리랑은 전통아리랑, 신민요 아리랑, 현대적인 대중가요 아리랑 등의 변용을 거치며 다양한 모습으로 기록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3.1 연원 및 변천

<신아리랑>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30년 6월 「조선민요 아리랑, 조선민요의 연구(2)」이다.

 

<신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를 못가서 발병나네

 

가사는 4절인데, 그 중에 1절에 해당하는 내용이 영화주제가 <아리랑>과 같다. 곡명은 <신아리랑>으로 달라졌지만 과거와의 연속선상에서 변형된 형태이다. 그런데 연원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일한 내용의 가사들이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어르렁 타령(打令)>

날 바리고 가는 임은

십리를 못 가서 발병 나지 (1912년, 한국민요집 Ⅵ-364)

 

<사랑가(歌)>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十里)도 못가서 발병난다 (1912년, 한국민요집 Ⅵ-1125)

 

1912년 『이요⋅이언급 통속적 독물 등 조사』에 <어르렁 타령(打令)>이라는 이름으로 아리랑이 채보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1918년, 『호박 목걸이』)

 

1918년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들었던 한 소절을 『호박 목걸이』에 기록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 (1926년, 영화주제가 <아리랑>)

 

아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어서 그 당시에 금강산 장안사라는 비교적 외진 곳에서도 노래가 불리고 있으며, 전통과의 연속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미미하게 변형되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26년에 상영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아리랑을 기억하여 만들게 되었다고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삼천리』, 1937. 1)에서 나운규가 회고하였다. 영화주제가 <아리랑>과 <신아리랑>은 같은 내용이다.

<신아리랑>은 기존에 전래되던 전통아리랑의 곡조와 일부의 가사를 변형하여 만든 것이다. <신아리랑>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편 <신아리랑>이 과거로부터 연속되며 나아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1959년에 <본조 아리랑>이라는 명칭이 조선의 민요(성경린⋅장사훈)에 등장하였다. 전체가 11절로 되어 있는데, 관련된 부분은 후렴구와 10절이다.

 

<본조(本調) 아리랑>

이씨(李氏)의 사촌(四寸)이 되지 말고

민씨(閔氏)의 팔촌(八寸)이 되려무나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 (1절)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十里)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 (10절)

 

<본조 아리랑>은 영화주제가 <아리랑> 노래나 <신아리랑>과 달리 후렴구가 뒤에 나온다. 가사의 일부도 다른데,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대신에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라고 되어 있다.

<본조 아리랑>은 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노랫말의 한 종류를 기술한 것이다. 아리랑은 시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기본은 1920년대 이전의 전통아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3.2 내용

아리랑은 『매천야록』(1894년)에서 존재가 확인된 이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6월 「조선민요 아리랑」에 <신(新)아리랑>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함으로써 신민요 아리랑을 대표하는 곡명이 되었다.

 

<신(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十里)를 못 가서 발병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풍년(豐年)이 온다네 풍년(豐年)이 온다네

삼천리(三千里) 강산(江山)에 풍년(豐年)이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천(山川)에 초목(草木)은 젊어가고

인간(人間)에 청춘(青春)은 늙어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青天) 하늘엔 별도 만코

우리네 살림사리 말도 만타 (1930년 6월)

 

영화주제가 <아리랑>과 <신(新)아리랑>을 비교하면, 영화주제가 <아리랑>의 4절을 <신(新)아리랑>에서는 2연으로 했고, ‘십리도’가 ‘십리를’로, ‘이 강산 삼천리’가 ‘삼천리 강산’으로 바뀌었으며, 일부의 글자도 한자로 바뀌었다.

한편, 같은 해 7월에 수록된 <신아리랑>은 이전 가사와 내용이 다르다. 나중에 나타나는 <신아리랑>이라는 곡명도 모두 이러한 변형의 방식을 취하게 된다.

1934년 <최신 아리랑>⋅<마즈막 아리랑>⋅<아리랑 눈물고개>⋅<아리랑 눈물고개> 등의 노래가 레코드로 취입되었다. 강남향⋅고복수⋅이난영은 함께 <신아리랑>을 불렀다.

1930년대 중반에 다양한 종류의 <신아리랑>이 대거 등장하여 유행한 이래,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959년 성경인⋅장사훈은 <본조 아리랑>⋅<밀양 아리랑>⋅<강원도 아리랑>⋅<진도 아리랑>⋅<긴아리랑>⋅<신아리랑>⋅<별조 아리랑>⋅<아리랑 세상> 등과 같은 명명법을 사용하면서 <신아리랑>을 소개하였다.

 

<신(新) 아리랑>

산천초목(山川草木)은 젊어 가고

인간(人間)의 청춘(靑春)은 늙어 간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성황당(城隍堂) 까마귀 깍깍 짖고

정(情)든 님 병환(病患)은 날로 깊어

무산자(無産者) 누구냐 탄식(歎息) 마라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은 돌고 돈다

감발을 하고서 주먹을 쥐고

용감(勇敢) 하게도 넘어 간다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가 보냐

 

아리랑은 『매천야록』에서 기록된 이래 전통 아리랑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러 신민요 아리랑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영화주제가 <아리랑>이며, 이를 일부 수정한 것이 <신아리랑>이다.

 

Ⅳ. 시기별 흐름과 진행 현황

전통아리랑은 시기적으로 1920년대 이전에 만들어져 불리어온 아리랑을 뜻한다. 헐버트(H. B. Hulbert)가 채보한 <경기 아리랑>(1896년), 앨리스 플레처가 녹음한 아리랑(1896년), 영월군에서 채집된 <아리랑 타령> 등 『이요⋅이언급 통속적 독물 등 조사』(1912년)에 나오는 전국의 아리랑, <경셩 아르렁 타령>(1913년), 독일에서 포로가 된 한국인이 부른 아리랑(1916년), 메리 테일러가 채보한 아리랑(1918년) 등은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전통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유행하던 전통아리랑이 기록 속에서 존재하는 형태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향토민요적 성격의 아리랑이 있다. 이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각 지역별로 자생적으로 전승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 일부는 신민요에 편입되었다가 대중가요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신민요가 유행하던 시기에 출현한 <신아리랑>은 영화주제가 <아리랑>의 가사를 변형하여 만들었다. 기존의 아리랑과 다르다는 측면에서 <신작(新作) 아리랑>이나 <신아리랑>, <최신 아리랑>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신민요로서의 아리랑이 크게 유행하면서 많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왕수복은 <신아리랑>⋅<봄맞이 아리랑> 등을 불렀고, 선우일선의 <그리운 아리랑>⋅<즐거운 아리랑>, 장일타홍의 <아리랑의 꿈>, 김선영의 <아리랑 세상>, 백난아의 <아리랑 낭낭>, 김용환의 <꼴망태 아리랑>, 이화자의 <아리랑 삼천리>, 백년설의 <아리랑 만주>, 김봉명의 <아리랑 술집> 같은 노래도 있다.

현재는 신민요 아리랑이나 <신아리랑>이 새롭게 창작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에 불리던 노래들은 유성기 음반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며 존재하고 있다.

 

Ⅴ. 결론

전통아리랑은 아리랑의 본질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형태이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다양한 원형적 특질을 추출함으로써, 아리랑의 근원적인 성격을 알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원형적 심성과 공감대를 알아낼 수 있다.

한민족 정신세계의 원형(Archetype)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민족혼(民族魂) 아리랑의 문학 장르적 특성과 텍스트 상황을 밝히는 것은 민족적 자존과 위엄을 찾는 일이며, 그 중심에 전통아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전통아리랑은 역사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문화적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 단순한 노래라는 차원을 넘어 문학⋅예술⋅공연⋅방송물⋅축제⋅문화콘텐츠 등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으로 외연이 확장되고 있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코리아(Korea)를 상징하는 노래로 인식되고 있다.

아리랑이 시대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도 근본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국내외 중요 행사 등에서도 전통아리랑이 연행되고 있다.

한편 신민요 아리랑은 전통아리랑이 현대적인 대중가요 아리랑으로 변모하는 전환기에 나타나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전통아리랑은 변형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영화주제가 <아리랑>(1926년)은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이라는 곡명은 바뀌지 않고 있었는데, 1930년 6월에 이르러 <신아리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곡명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아리랑을 대표하는 곡명이 되었고, 신민요 아리랑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유성기 보급의 확대에 따라 많은 가수들이 음반으로 남겼는데, 그 중에는 곡명으로서의 <신아리랑>을 포함하여 다양한 노래들이 있다. 또한 곡명은 <신아리랑>이지만 서로 다른 내용의 노래들이 시차를 두고 존재하였다.

대중의 관심이 약해지면서 신민요 아리랑도 서서히 소멸되어 갔지만 레코드 음반 속에서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더욱이 신민요 형태로 음반에 남겨진 아리랑은 이후에 많은 민요 가창자들이나 대중이 따라 부르게 되었고, 그러한 결과 오늘날에는 신민요 아리랑이 전통아리랑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신민요 아리랑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신아리랑>은 전통아리랑의 원형적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사의 기록이 되었다.(재25주제 끝)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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