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장림 제주목사가 성 쌓아..대포동 동해방호소 터(추정)
상태바
[향토문화] 장림 제주목사가 성 쌓아..대포동 동해방호소 터(추정)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02 1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시 주둔 군사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동수라는 샘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대포동 동해방호소 터(추정)

• 소재지: 대포동 368-1번지
• 시대: 조선
• 유형 ; 방어유적(진) 터

대포동_동해방호소터추정
동수

 

조선시대 방어시설 중 대포 지경에는 동해방호소와 대포연대가 있었다. 《제주삼현도》(1700년대), 《탐라지도병서》(1709), 《대정군지도》(1872) 등을 보면 동해방호소는 대포 지경 중산간 지역에 있었다.

대포동 301번지 일대로 회수 마을과 하원 마을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동해방호소는 대정현 동부 지역을 감시하는 방어유적으로 원래 강정마을에 있었던 가래방호소를 1510년에 옮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5년 9월 16일 장림이 제주목사로 부임해 와서 방어시설에 대한 것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 … 정의현의 수산포와 서귀포, 그리고 대정현의 차귀포와 동해포(東海浦)는 적들의 배가 머물 만한 곳으로 의심이 됩니다. 때문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방호소에 육군 1려(旅)를 나누고 2교대로 나누어 군관을 보내 방어토록 하였습니다.

수산과 차귀포에는 옛 성을 고쳤고, 함정과 말뚝을 세워 침입에 방비하였습니다만, 나머지 7포는 원래부터 성(城)이 없었으므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함경도나 평안도의 예에 따라 성을 쌓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각 성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지으면서 출입케 하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1500년대초까지는 동해방호소에 성을 쌓지 않았었고, 장림 목사가 성을 쌓았다는 말이다.

당시에는 성 둘레가 500척, 높이는 8척이었으며 성내에는 객사와 군기고까지 있었으나, 후에 모슬포에 이전되면서 폐쇄되었다.

현재 성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당시 주둔 군사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동수라는 샘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4․3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에는 10여 호의 민가가 있었다. 이 동네를 대포상동이라고 불렀는데 4·3사건으로 소개되면서 폐촌되어 버렸다.
《작성 15121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