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풍수비보용 벽..대포동 답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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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풍수비보용 벽..대포동 답단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0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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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답단이는 문중에서 세운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포동 답단이
 

• 소재지: 대포동 1049번지의 동쪽 경계선
• 시대 : 조선후기(1893년)
• 유형 : 민속신앙(비보풍수 관련 탑)

 

대포동_답단이

 

이 지경은 속칭 답단이(답다니) 또는 어둔르라고도 하는데, 탑의 형태는 사다리꼴형이고, 성담처럼 생겼다.

하단부에는 비교적 큰 돌로 쌓았고,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져 상단부에는 중간 크기 정도의 돌로 쌓았는데, 대체적으로 큰 돌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길이 14m, 높이는 동쪽 밭에서는 330㎝, 서쪽 밭에서는 230㎝, 하단 폭은 170㎝, 상단 폭은 40㎝이다.


벽의 동쪽 가운데에 조그만 안내표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답(俗稱 답단이)은 晋州姜氏正郞公派二十世諱德齊公墓 大浦洞 1079番地에서 西쪽 군상봉에 쥐(鼠)가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1788年에 답을 石築했는데 그 당시 일꾼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고 베 수건을 나눠주면서 열나흘 동안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경을 답단이라고 大浦마을 향토지에 記錄되어 불려지고 있다. 2009년 3월 1일 晋州姜氏正郞公派德齊孫門中會〉

마을에서는 동쪽에 해당하므로 동답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마을에서 설치한 방사용 벽이 아니라 문중회에서 쥐 형상을 막기 위해 설치한 풍수비보용 벽이라는 것이다.


한편, 대포동에 답을 세우자고 주장한 고영후기념비를 보면


〈생각하건대 우리 마을의 지형은 세 방향이 공허한데 그 중에서도 남쪽이 크게 허하였다. 그러므로 선인들이 골짜기를 메우려는 뜻이 있었으나 아직 수행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금년에 이르러 유지인사인 고영후공께서 마침 이장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할 방도에 전심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오직 이 허한 곳을 방비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백금으로 그 땅을 산 뒤 부이장 임광춘과 함께 주관하여 역사를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서로 일을 도우니 메우기 시작한 지 5일만에 세 방향의 공사가 다 이루어졌으며 특히 큰 공사는 남쪽에 있었다. 이 역사가 완공된 뒤 마을의 형승이 굉장하고 마을 사람들의 기쁜 소식이 나날이 나아졌다.

이 공사는 곧 선인들이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이나 오랜 세월 동안에 기이하게 만난 기회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하는 몇 선비들이 매우 큰 공훈의 자취가 아주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비갈을 세우고 사실을 표시하여 기록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마을에서 세운 기념비에는 탑을 세 곳에 세웠다고 했다. 그러면 문중회에서 설치한 표석 내용 마을 기념비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답단이는 문중에서 세운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포동 출신 현직 중등교사이며 마을지 『큰갯마을』 집필에도 참여한 김〇〇에 따르면 마을 남동쪽에도 대포천을 가로지르는 답이 있었는데 30년쯤 전에 큰 비가 와서 내가 터질 때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고 하였다.

따라서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렇게 없어져 버린 탑이 기념비에서 언급한 세 개 중의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작성 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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