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철종7년(1856) 오현단 서쪽 암벽에 새겨..이도1동 증주벽립 마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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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철종7년(1856) 오현단 서쪽 암벽에 새겨..이도1동 증주벽립 마애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09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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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학습을 해야 한다'

이도1동 증주벽립 마애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오현길 61) 오현단 경내
시대 : 조선후기
유형 : 마애명

서울_명륜동_증주벽립

 

이도1동_증주벽립

 

오현단 조두석 서쪽에 암벽이 있고 그 암벽에 曾朱壁立이란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왼쪽에는 작은 글자로 後學蔡東健 後學洪敬燮 崇禎四丙辰 摹刻이라고 새겼다.

'曾朱壁立은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학습을 해야 한다' 또는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벽에 새겨 세운다' 등의 뜻이다.

채동건은 당시 제주목사이고 홍경섭은 제주판관이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데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조선 선비들은 청나라 연호를 기피하고 숭정 후 몇 甲子라는 식으로 명나라 연호를 쓰려고 하였다.

명나라는 중화이고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숭정 후에 네 번째 돌아온 병진년이라는 뜻이므로 1856년이다. 마지막 글자 摹刻은 본떠서 새겼다는 뜻이다.

원래 송시열이 쓴 증주벽립 마애는 위 사진처럼 서울 명륜동1가 2-22의 골목길(성균관로 17길)에 있다. 성균관대학교 인근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터로서 통칭 송시열 경저(京邸)였던 곳이다.

송시열은 충청도 옥천 출생으로 뒤에 회덕 등에서 살았고 만년에는 괴산 화양동에 머물렀다. 따라서 서울에는 오래 거주하지 않았는데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서울 흥덕동 성균관 부근인 숭교방(崇敎坊)에 거처하였다.

『漢京識略』(한경지략)과 『東國輿地備考』(동국여지비고)에는 〈우암의 옛집이 송동에 있는데 석벽에 우암 글씨로 曾朱壁立(증부벽립)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있는 글자를 제주 출신 변성우(邊聖雨)가 1786년 성균관 직강((成均直講)으로 있을 때 탁본해 온 것을 채동건 목사와 홍경섭 판관 때인 철종7년(1856) 오현단 서쪽 암벽에 옮겨 새겼다.
《작성 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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