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순무어사로 한라산신제 봉행..토평동(영천동) 한라산정상 심낙수마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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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순무어사로 한라산신제 봉행..토평동(영천동) 한라산정상 심낙수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10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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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이 진휼미 관청에 실어 보내 수천명이 목숨을 건진 일도 심낙수 목사 때의 일

토평동(영천동) 한라산정상 심낙수마애명

 

위치 ; 서귀포시 토평동 산15-1번지. 한라산 정상 동쪽 암벽
시대 : 조선(1794년)
유형 : 마애명

백록담_마애_심낙수

 


한라산 정상 암벽에는 약 30여 개의 마애명이 있다.

마애명은 모두 보호구역 안에 있어서 일반 등반객들은 관찰할 수는 없는 위치이다. 새긴 사람은 김정, 이익, 조관빈, 조영순, 조정철, 심낙수, 임관주, 이양정, 엄사만, 최익현 등 조선시대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제주인으로는 명월만호를 지냈던 조천읍 조천리 출신 김종보와 최익현을 안내하였던 오라동 출신 이기온이 있다.

그리고 민복기, 길성운 등 대한민국 시대의 인물도 눈에 띈다. 보통은 이름과 직책을 새겼지만 임관주와 같이 시를 새긴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북쪽 암벽에는 현대에 새겨진 낙서들도 매우 많다. 여기서는 심낙수의 마애명을 소개한다.


심낙수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가정이 가난하였으나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영조51년(1775)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을 거쳐 정조3년(1779)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정조4년(1780) 부수찬을 지냈으며, 교리로 있을 때 홍국영(洪國榮)의 죄를 탄핵하여 한때 삭직되었다.

영조10년(1786) 고부재자관(告訃齎咨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조11년(1787) 홍문관수찬으로 있을 때 김구주(金龜柱)를 탄핵하다가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으며, 정조17년(1793)에 홍문관수찬으로 재기용되었다.

정조17년(1793) 12월 홍문관 교리에 있다가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제주에 도착해서는 전임목사 이철운의 부정을 탄핵했으며, 많은 폐단을 바로잡고 간악한 아전을 벌하고 충신을 정려하였으며, 왕명에 따라 문·무과 시험을 시행하여 김면헌, 변경붕, 부종인, 고명학, 홍달훈, 이태상, 정태언 등 문과 합격자 7인과 홍범익 등 무과 합격자 3인을 전시에 바로 응시하게 하였다.

또한 의사(義士) 오홍태, 효자 박계곤, 열녀 박씨, 충비(忠婢) 고소락의 가문을 정표(旌表)하고 정녀(貞女)인 사비(私婢) 옥매의 집안에 요역을 면제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런 까닭에 다음해 3월에 현지에서 제주목사로 제수되었다. 그런데 목사로 제수되자마자 큰 흉년이 닥쳤다. 심낙수는 흉년에 대하여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황을 보고했다.

“굶어 죽은 사람이 600여명에 달합니다. 섬 전체에 전염병이 성했고 거듭 흉년이 들었습니다. 며칠 새 해일을 동반한 동풍이 불면서 곡식들이 바다의 짠물에 김치를 담근 것처럼 절여졌습니다. 쌀 2만여섬이 없으면 백성들은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이를 본 정조가 곡식 1만1000석을 배 5척에 실어 제주로 보냈지만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이 때 김만덕이 구세주로 등장하였다. 반평생 객주 운영으로 모은 돈으로 육지에서 곡식을 사와 진휼미로 관청에 실어 보냄으로써 부황으로 죽어가던 수천명이 목숨을 건진 일도 심낙수 목사 때의 일이다.

그런데 심낙수는 불행히 병을 얻어 낫지 않았다. 정조18년(1794) 10월 유구국 사람이 본도에 표도하였을 때 질병으로 인하여 문정(問情)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느껴 사임하여 제주를 떠났다.

심낙수는 순무어사로 제주도에 파견될 당시 한라산신제를 지내도록 하교받았다. 성종1년(1470) 이약동 목사가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지내도록 조치한 후에도 왕의 특명을 받고 온 경우에는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낸 경우가 있었다.

심낙수의 마애도 제주목사로 임명되기 전 순무어사의 신분으로 제주도민의 무사안녕을 위한 한라산신제를 봉행하러 갔다가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심낙수의 마애는 가로 55㎝, 세로 80㎝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평평하게 갈아낸 다음 글을 새겼다. 심낙수의 각자가 있는 옆에는 새긴 날짜 없이 정의현감 남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것도 가로 27㎝, 세로 40㎝의 직사각형으로 표면을 갈아낸 다음 글자를 새긴 것이어서 심낙수 어사와 동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근거로 심낙수의 마애명은 남수 현감이 주도하여 세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새겨진 글자는 〈恩坡退士沈樂洙以巡撫御史來過 甲寅 春〉이며,


〈은파 퇴사 심락수가 순무어사로 와서 지나가다. 갑인년 봄〉으로 해석된다. 은파는 심낙수의 호이며 퇴사는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고 있는 선비를 뜻한다.

관직에 있으면서 퇴사(退士)라는 표현을 쓴 것은 순무어사를 정규직 관직으로 여기지 않았거나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갑인(甲寅)은 1794년이다.

《작성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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