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유불조화론 주장..금성리 보우스님 유배지 도림사(道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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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유불조화론 주장..금성리 보우스님 유배지 도림사(道林寺)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3.17 0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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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취한 듯 꿈 속에 사는 세상에 와서 50여 년을 실없이 미쳐 날뛰었네"

금성리 보우스님유배지도림사(道林寺)

 

위치 ;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1149-41번지(어도봉길 123-3)
유형 : 옛 절터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금성리_도림사 옛석재
금성리_도림사

 

꿈에 취한 듯 꿈 속에 사는 세상에 와서
50여 년을 실없이 미쳐 날뛰었네.
인간의 영예와 욕된 일을 다 해 보았으니
중의 탈을 벗고 높고 높은 데나 오르련다. -보우스님-


보우(普雨: 1510∼1565)스님의 호는 허응당(虛應堂)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자 노력한 사상가이자 선승(禪僧)이다.

15세에 출가하여 금강산(金剛山) 마하연암(摩訶演菴)에서 수행하였다. 명종3년(1548)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으로 서울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취임하게 된다.

봉은사 주지로 있는 동안 명종의 어머니이자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며 실세였던 문정대비를 소개받아 억불정책으로 침체된 조선 불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명종5년(1550) 문정대비가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림으로써 봉은사(奉恩寺)는 선종(禪宗)의 본사(本寺)로,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사로 지정되고 보우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로 부임하게 된다.

명종6년(1551) 도승시(度僧試)를 실시하여 도첩제도, 그리고 다음해인 명종7년(1552)에는 승려들의 지위를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과거시험인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때 발탁한 스님이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이다.

그러나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의 유생들은 끊임없는 상소를 올려 보우스님을 탄핵하였다. 보우는 불교 개혁 운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주자(朱子)의 이기설(理氣說)을 포용하여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강조한 유불조화론(儒佛調和論)을 주장하며 당시 상황에 맞게 대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선과 교를 구분하여 수행하던 당시의 불교계에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잘못된 불교관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명종20년(1565) 4월 문정대비가 죽자 유생들을 피해 한계산 설악사(雪岳寺)에 은거하지만 율곡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유림들의 끊임없는 요구로 결국 명종은 1565년 6월 보우스님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게 된다. 이때 보우스님이 유배당한 곳이 지금의 어도봉 자락에 자리 한 도림사(道林寺) 일대로 알려져 있다.

도림사 경내에는 과거부터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절새미물이 지금도 남아서 꺼져가던 조선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자 노력한 보우스님의 일기를 비춰주고 있다.

같은 해 11월 보우스님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그렇게 한 고승(高僧)은 한 떨기 꽃처럼 잠시 피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이 사바세계에 머물다 갔다.

보우스님의 저술로 『허응당집(虛應堂集)』, 『나암잡저(懶庵雜著)』, 『권념요록(勸念要錄)』, 『불사문답(佛事問答)』 등이 대표적이며, 현대에 들어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16년 1월 현재 도림사는 잡초가 무성하고 스님이 없는 상태이며 마당에는 옛건물의 석재로 추정되는 잘 다듬어진 돌들이 몇 개 남아 있다.
《작성 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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