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읍성의 서문 터(西門址)..삼도2동 백호루→진서루(멸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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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읍성의 서문 터(西門址)..삼도2동 백호루→진서루(멸실)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5.25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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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삼도2동 백호루→진서루(멸실) 터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841, 851, 857번지 일대
시대 ; 조선/조선 전기
유형 : 관방유적(성문)

 

삼도2동_제주성서문주춧돌
삼도2동_진서루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은 태종11년(1411)에 제주읍성을 보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체계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주성에는 남문·서문·동문 등 3문이 있었다. 성의 북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고, 외적이 해안을 통해 곧바로 침략할 수 있어서 북문은 설치하지 않았다.

성문(城門)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공격과 방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적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해야 하므로 요충지에 성문이 설치됐다. 성문 밖으로는 옹성을 구축하여 외적이 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한 건축물을 문루(門樓)라 하며 유사 시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됐다. 문루는 적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감시초소 기능을 하였으므로 초루(譙樓)라고도 불렸다.

제주읍성의 서문 터(西門址)이다. 서문에는 백호루(白虎樓)라고 불리는 서문루가 있었다. 백호는 동서남북 방위 중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서문루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영조15년(1739)에 제주목사 조동점이 중수하고, 영조49년(1773) 목사 박성협이 다시 중수한 뒤 백호루를 진서루(鎭西樓)라 하여 친필로 편액을 바꾸었다.

이원조(李源祚)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 “진서루는 서쪽 성문인데 옛날에는 백호루(白虎樓)라고 불리었다.

영조 기미년(영조15년, 1739)에 목사 조동점이 다시 세웠다(鎭西樓 西城門 舊號白虎樓 英廟己未 牧使趙東漸重建)” 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문과 진서루 역시 1914년 일제에 의해 헐렸지만 제주성 서문의 옛사진이 남아 있다. 둘째 사진은 1905년 제주에 상륙해 43일간 체류한 미국인 동물학자 말콤 P. 앤더슨이 찍은 것이다.

제주읍성의 다른 성문처럼 성문은 사라졌지만 서문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주춧돌(위 첫째 사진)이 일부 남아 있고 이 일대의 길을 보면 옹성이 설치되었던 곳(동문 연상루 터도 길이 이와 비슷함)임을 추정할 수 있다.

서문 밖에 세웠던 돌할으방 8기는 1960년대 중반에 삼성혈(4기), 공항(2기) 등으로 옮겨졌으며 1970년대에 목석원으로 옮겨졌던 1기는 돌문화공원에 가 있고, 1기는 소재不明 이다.

제주도는 2011년 제주목 관아와 연계해 진서루 복원을 추진했으나 도로와 사유지가 있어서 사업이 중단됐다.

서문 터임을 알리는 표석은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180m 가량 떨어진 무근성길(삼도2동 1071-4번지)에 있다.
《작성 1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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