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영주십경의 하나 정방하폭(正房夏瀑).. 동홍동 정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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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영주십경의 하나 정방하폭(正房夏瀑).. 동홍동 정방폭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6.11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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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동홍동 정방폭포

명승 제43호(2008.08.08. 지정), 제주도 기념물 제44호(1995년 8월 26일 지정)
위치 ; 서귀포시 동홍동 2181번지(동홍천)의 맨 아래. 서귀동 102-3번지의 동쪽, 동홍동 299-3번지의 서쪽 해안
시대 ; 미상
유형 ; 자연유산(폭포)

정방폭포_무지개(다음블로그_세상사는이야기).
정방동_정방폭포

 

서귀포시 서귀동과 동홍동의 경계를 이루는 동홍천의 맨 아래에 있는 정방폭포의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西歸浦 海岸帶는 地殼變動때 솟아난 절벽으로 이루어진 柱狀節理層이어서 마치 거대한 돌병풍을 두른 것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높고 낮은 돌기둥이 서로 어우러지고 맑디 맑은 바닷물과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며 생기는 하얀 飛沫은 보는 사람들이 감동을 유감없이 자아낸다. 예로부터 이곳을 정방하폭(正房夏瀑)이라 하여 영주십경의 하나로 삼았다.

정방폭포는 숲에서 보는 것보다는 여름철 앞바다에 배를 띄워 바라보는 것이 더욱 장관이다. 마치 하늘에서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하여 정방하포(正房夏布)라고도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바다에서 금빛 구름이 한 무더기 솟아올라 그 속에서 황금색의 공룡이 나와 한참동안 폭포를 바라보다가 흥에 겨워 춤을 추다 사라졌다고 한다.

제주도는 보통 4번의 분출기를 통해 형성되었다. 제1분출기(87만 년)는 해수면 아래의 기저부를 형성, 제2분출기(60만 년∼37만 년)는 용암대지 형성기로 한라산 본체를 제외한 제주도 대부분 모습이 결정되었다.

제3분출기(27만 년)는 중앙부의 중심분화로 한라산의 순상화산을 형성하였고, 제4분출기는 제주도 전역에 걸쳐 소형 화산체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제주도의 지질은 기반암과 화산분출암인 현무암류, 조면암류, 조면암질안산암류, 화산분출물 및 화산쇄설성 퇴적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의 남부해안에는 해식애 등의 비고가 큰 지형이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해안가에는 용암분출 시 발달하는 수직절리로 인해 폭포가 발달되어 있다. 정방폭포는 조면암질에 잘 발달하는 주상절리로 인한 수직형 폭포에 해당된다.

제주도의 제2분출기의 후반에 서귀포시의 해안에 분출된 조면암질 용암은 점성이 크고 유동성이 작은 중성용암으로서 비교적 두껍게 흐르면서 용암류의 말단에 비고가 큰 지형을 형성하였다.

즉, 용암류의 말단에 주상절리가 형성되면서 수직에 가까운 해식애를 만들고, 여기에 하천이 흘러 정방폭포를 형성하였다. 정방폭포의 원류는 고냉이소(서귀동 962번지)이다. 암반틈의 여러 곳에서 용출하는 양은 1일 1000-3000세제곱미터이다.(서귀포시 編 우리 시의 용천수)

정방폭포의 상류하천은 동홍천이다. 정방폭포 상류 정방수원지 상류 50m 지점(일주도로변 서신교에서는 20m 하류)에는 폭포를 거느린 커다란 소가 위치하고 있다.

정방폭포 뒤에 한라산을 등지고 산록·평지·고원에는 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며 녹음이 우거진 서귀포 해안에 있어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어, 영주12경(瀛州十二景)의 하나로 꼽는다.

작은 못이 형성되어 바다와 이어진다. 폭포의 장쾌한 폭포음과 시원한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정방폭포의 물은 신경통에 좋다는 설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ww.jeju.go.kr/culture/ 제주의 문화재)

전설에 의하면, 중국 진시황 때 황제의 사자인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500쌍을 거느리고 상륙하여 찾아 헤매었으나 캐지 못하고, 폭포벽에 ‘徐不過此(서불과차)’라는 네 글자를 새기고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넓은 중국땅을 처음으로 통일하여 황제가 된 진나라 始皇은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모든 권한을 한 손아귀에 넣고 온 천하를 호령하면서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늙음을 막고 수명을 연장하면서 장수 영생할 길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황은 신하들에게 불로장생할 수 있는 영약을 구해오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 서불이 시황 앞에 나타나 그 영약을 자기가 구해 올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동해바다 한 가운데 瀛洲山(영주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오직 신선들만이 살고 있으며 불로장생의 영약도 있습니다. 신에게 동남 동녀 각 5백을 딸려 준다면 반드시 그 영약을 구해 올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시황은 기쁜 나머지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기로 하였다.

이에 서불은 崑崙山(곤륜산)의 천년묵은 고목을 베어 큰 배를 만들고 동남 동녀 5백을 거느리고 제주도를 찾아왔다.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조천포였다. 이곳에서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朝天」이라는 글자를 바닷가 바위에 새겨 놓았으며 한라산에 올라 영악을 찾았으나 영악을 얻을 수 없었고 대신 시로미(岩高蘭)을 캐었다.

그들 일행은 서귀포로 내려와 이곳 정방폭포 암벽에 「徐市過之(此)」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그들은 「西쪽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서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반대쪽인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이다.

이 「서불과지」라는 마애각은 8·15 이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정방폭포 위에 전분공장이 생겨 폐수가 이곳으로 흐르기 시작한 뒤부터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 일행이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西歸浦」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또 일설에는 이들 일행이 떠날 때 동남 세 사람이 낙오되어 그대로 제주도에 남게 되었는데 이들이 탐라를 건국하는 시조가 되었으며 또 일본에 건너간 서불이 이들 세 낙오자를 위하여 세 동녀를 보내어 짝을 맺도록 하여 건국의 대업을 이루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물론 예로부터 전해온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자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서복(서불)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기원저 3세기에 서복일행이 계획적으로 집단망명한 것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서복일행의 제주도래설도 전설로만 남길 수 없는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https://www.jeju.go.kr/culture/ 제주의 문화재)
《작성 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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