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성 안 가득 별과 달 다시 뜨네'..이도1동 칠성대 제1처(천추성)(멸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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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성 안 가득 별과 달 다시 뜨네'..이도1동 칠성대 제1처(천추성)(멸실)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6.1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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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의숙 뒤편에 칠성단이 있었고,나라에 중요한 일 있을 때 모였던 곳 뒷받침

이도1동 칠성대 제1처(천추성)(멸실) 터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92-3번지(주차장)
시대 : 미상(탐라시대?)
유형 : 민속신앙

칠성대(매일신보).
이도1동_칠성대제1처천추성표석

 

북두칠성이란 북극 하늘에 7개의 별이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북두·북두성·칠성이라고도 한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국자 머리부터 천추(天樞)·천선(天璇)·천기(天璣)·천권(天權)·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이라고 부른다.

머리에 해당되는 앞의 4개를 묶어 괴(魁), 손잡이 부분에 해당하는 뒤의 3개를 묶어 표(杓)라고 하고, 다 합쳐 두(斗)라 한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여겼다.(나무위키, 두산백과)

그 모양이 기름이나 술을 풀 때 쓰는 국자와 비슷한 '두기'를 닮아 두자를 쓴다. 북두칠성은 밝고 모양이 뚜렷해서 항해의 지침이나 여행의 길잡이로 이용되었다. 또한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주운동을 하고 북반구에서는 사계절 어느 때나 볼 수 있으므로 그 위치를 보면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어 밤에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도 쓰였다.(다음백과)

한국의 민간신앙에서는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예는 거의 볼 수 없으나, 북두칠성은 신으로 모시기도 했는데, 칠성은 비, 수명, 인간의 운명 등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 칠성단을 쌓고 그 위에 정화수를 놓아 빌기도 했다.(다음백과)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매우 일반적인 것은 아마도 불교의 칠원성군(七元星君) 신앙이나 도교의 칠성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규보(李奎報)의 ≪노무편 老巫篇≫에 나오는 칠원은 칠원성군 곧 칠성을 뜻하는 것으로, 무속에서는 적어도 고려 말에 칠성을 신으로 모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칠성신앙은 무속 및 민간신앙으로서 일반화되고, 그것이 불교사찰 안에서까지 모셔지게 되었다.

북두칠성은 ‘하늘의 목구멍과 혀(天之喉舌)’에 해당된다고 한 고사처럼, 하늘을 상징하고 나아가 천체 기상을 관장하는 신으로 생각되고 있다. 하늘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에서, 인간의 운명·숙명, 그리고 인간의 재수를 관장하고 농사와 관계있는 비를 내리게 하는 신으로도 생각되고 있다.

칠성신은 구체적인 어떤 신체(神體:신령을 상징하는 신성한 물체)로써 상징된다. 중부지방의 무속에서는, 무녀들이 신체로 삼고 있는 동경(銅鏡)인 명도(明圖:무당이 수호신으로 위하는 청동 거울)에 칠성을 그리거나 문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천체로서의 칠성을 명도와 결합시켜 신체화한 것이다.

때로는 칠성단이라는 단을 쌓고 그 위에 정화수를 놓아 신체로 삼기도 하는데, 그것은 물(비)의 신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는 뱀이나 용으로 상징되기도 하고, 불교사찰이나 무녀의 신당 안에 인격신으로 그림으로 표현되어 모셔진 것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뜻에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생각되어 ‘칠성님께 명을 빈다.’는 말이 있고, 또 단명으로 태어난 아이의 운명을 북두칠성이 고쳐 주어 장수하였다는 신화가 있어 수명과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기능을 말해 준다.

또 비를 내려 농사를 풍년들게 하는 점에서 재물의 신으로도 모셔진다. 특히 제주 지방에서는 칠성신이 뱀으로 상징되고, 집의 재물신으로도 모셔지고 있다. 이들 칠성신앙이 반드시 하늘에 있는 칠성신을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늘·비·별을 추상화하고 신앙화한 것이라 생각할 수는 있다.

북두칠성은 효성스런 일곱 아들이 죽어 된 것이라고 하거나, 바리공주 무가에서는 바리공주가 낳은 일곱 아들이 죽어 하늘에 올라가 된 것이라고도 한다. 모두 죽어 별이 되었다는 것으로, 별의 인격신화를 말해 주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에 성인이 되면 머리 위에 상투를 올리는 데 상투는 한자어 상두(上斗)에서 나온 말로, 상두는 북두칠성(北斗)을 뜻한다. 상투를 틀 때 앞으로 4번, 뒤로 3번 꼬면서 항상 북두칠성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을 지고 다시 칠성별로 돌아간다고 하고 있다.

시신을 안치한 관 속에 까는 얇은 널조각을 칠성판이라고 부르는데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놓거나 먹으로 7개의 점을 그린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고대로부터 북두칠성은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관장했다. 무속인들이 “칠성님께 명을 빈다”며 치성을 드리는 이유다. 제주지역은 칠성신을 뱀으로 상징하고, 집의 재물신으로 모시는 독특한 무속신앙이 내려오고 있다.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칠성대(七星臺) 또는 칠성도(七星圖)는 고대 탐라국시대부터 내려온 최고(最古)의 유적으로 탐라사회의 결속과 번영을 기원했던 상징이었다. 북두칠성 모양의 일곱개 탑으로 탐라국 시대 고(高)·양(梁)·부(夫) 3부족이 탐라 사회를 번영시키기 위해 일도·이도·삼도를 잇는 탑으로 탐라 개국의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일제시대까지 존재했었다.(제주포커스 110328)

칠성대는 제주성안 일곱 곳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흩어져 있었고, 돌이나 흙으로 쌓은 제단이었다. 칠성대를 확인할 수 있는 고문헌은 20종에 이른다.

최초로 기록한 문헌은 1530년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칠성도는 주성 안에 있고,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이 각각 일도, 이도, 삼도로 나누어 차지한 후, 북두칠성 모양을 본 떠 대(臺)를 쌓아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기록했다.

김정 제주목사가 쓴 노봉문집(1736년)에는 칠성도를 수축하라는 제목으로 “칠성도는 성안에 흩어져 있는데 모두 돌이나 흙으로 쌓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면서 그 터를 알 수 있을 뿐이기에 수축하도록 명하였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의 문집에는 그가 1736년 칠성대와 관덕정 뒤의 월대의 수리를 마치고 남긴 글이 있다.

〈옛 도읍의 유적 날로 황량한데
근처에 사는 사람들 모두 헐어 무너뜨렸네.
평평한 언덕처럼 마구 다녀 한번 이치를 밝히니
성 안 가득 별과 달 다시 뜨네.〉


강문규의 글(한라일보 101019)에 따르면 19세기초에 만들어진 남원양씨족보에는 칠성대의 위치도도 그려져 있다고 하며, 일찌기 향토사학자인 고(故) 홍정표, 홍순만선생이 고로들의 구증 등을 토대로 칠성대의 위치를 파악,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들 자료를 보면 칠성골에 3개소를 비롯하여 '생깃골(향교동)', '상청(上倉)골', '이아(二衙)골', '두목(斗目)골'에 각 1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시·서·화에 능했고, 제주향교의 도훈장이자 1931년 초대 제주읍장을 지낸 연농 홍종시(1857~1936)가 1900년 초에 제작한 제주고적도에는 칠성대가 있었던 위치를 표시했다. 점선의 길쭉한 원으로 그려진 위치도는 북두칠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앞서 제작된 제주읍성도 지도에는 칠성대의 위치에 상관없이 한 군데에 모아 그렸지만 홍종시의 지도는 해당 위치에 표시했다.

구한말 제주의 석학 심재 김석익(1885~1956)은 저서 파한록에서 “삼을나가 개국할 때 삼도로 나누어 거처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쌓았다고 한다. 대의 터는 지금도 질서정연하게 남아 있다. 향교전, 향후동, 외전동, 두목동에 있는데 세 개는 모두 칠성동에 있다”며 김정 목사가 수축한 이래 전래되던 칠성대의 장소를 서술했다.

제주의 교육·민속·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만농 홍정표는 탐라사에 관한 기고에서 “북두칠성에 대한 봉제의 제단으로 삼을나의 추장이 중심이 되어 제를 지냈는데 각 부족이 번영과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칠성대를 설명했다.

탐라인들은 왜 칠성대를 쌓은 것일까. (故)홍정표 선생은 "칠성대는 북두칠성에 대한 봉제(奉祭)의 제단이니 삼을나의 추장이 중심이 되어 치제(致祭)하는데, 각 부족의 번영과 아울러 나라(탐라국)의 융성함을 기원했던 자리"라고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탐라개벽 설화에 등장하는 세 부족이 활을 쏘아 일도, 이도, 삼도를 차지한 뒤 북두칠성 모양으로 대를 쌓아 나라의 번영을 위한 결속과 단합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다.((한라일보 2010년 10월 19일 논설실장 강문규 글)

일제강점기 칠성대가 있던 곳에 가옥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돌로 쌓은 제단은 평지로 변하면서 흔적이 지워졌다. 제주시는 2011년 고문헌과 자료, 위치 고증을 거쳐 칠성대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7곳에 안내 표지석을 설치했다.

칠성대의 마지막 모습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27대)인 순종(1874~1926)의 봉도식 장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일제는 순종을 창덕궁에 있게 했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비운의 왕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승하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됐던 매일신보는 1926년 5월 11일자에 ‘제주시민의 철시성복(撤市成服) 비장한 봉도식(奉悼式)’ 제하의 기사와 함께 사진을 실었다.

매일신보는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전국의 애도소식과 함께 제주에서의 상황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기사는 ‘제주도에서는 이달 5일 시민 일동이 이곳 갑자의숙(甲子義塾) 뒤편 칠성단(七星壇)에 운집하여 고(故) 이왕전하(李王殿下) 승하(昇遐)에 대해 소복으로 차려입고 근엄하게 봉도식(奉悼式)을 봉행했다’고 소개했다.

기사와 사진을 보면 제주읍내 갑자의숙 뒤편에 칠성단이 있었고, 칠성단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 백성들이 모였던 곳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칠성단은 작은 언덕 모양이며, 평지보다 2~3m 높고, 면적은 10평 남짓하며 둘레는 30~40m로 추정되고 있다. 1926년 당시 갑자의숙은 오늘날 중앙로터리 남쪽인 생짓골 주변에 있었다.

우근민 전 도지사는 2010년 선거 공약으로 칠성대 복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칠성대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고 사유지 매입 문제로 북두칠성 별자리 7곳에 표지석이 설치됐다./좌동철 기자(제주新보160829) 표석은 도로와 건물 때문에 정확한 자리에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정확히 칠성대가 있었던 자리라기보다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 세울 수 있는 자리라고 보는 게 옳다.

칠성대가 설치되었던 장소 중에서 제1처와 제2처 사이 거리의 5~6배를 연결한 위치에 삼성혈이 있다. 즉 별자리에서는 북극성의 위치에 삼성혈이 있는 것이다.

칠성대 제1처(天樞星, 천추성은 북극성을 뜻하기도 함)는 남문로터리에서 중앙성당으로 내려가는 길 약 70m 지점 주차장에 있다. 이 동네는 예전엔 생깃골로 불리웠던 곳이다. 향교가 있다고 해서 생교-생기로 발음이 와전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고, 천추성의 또 다른 이름이 생기탐랑성(貪狼星)이어서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다.

북두칠성 중 첫번째 별이고, 하늘의 축으로 별의 움직임에 중심을 잡아주며, 생명의 근원인 물을 생성하는 생기별이고, 천자의 음덕으로 하늘의 법도를 정하는 별, 지구의 회전축을 북극성에 연결하여 자기계를 이루는 별이라고 하며, 북극성과 함께 하늘의 중심을 잡으며 황제를 탄생시키는 별로 쥐띠해에 태어난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貪狼星君(雲義通證如來)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天樞生氣宮으로 貪狼이라 하고 오행은 목(木)이며, 총명(聰明, 문필(文筆), 귀(貴), 관직(官職) 등을 관장하는 것으로 본다.

증보탐라지와 파한록에 따르면 천추성은 두목동(현 인천문화당 남동쪽 골목)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매일신보 기사 사진에 나온 칠성대도 제1성일 가능성이 크다.
《작성 1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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